히타이트

히타이트(기원전 18세기경 ~ 기원전 1180년 또는 기원전 8세기) 또는 히타이트 제국고대 근동청동기 시대(3300~1200 BC) 중 기원전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의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으로, 히타이트어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4세기경에 최절정기에 들어섰는데, 당시에 아나톨리아의 대부분, 시리아 북서부(레반트의 북부), 남쪽으로는 리타니 강의 하구(지금의 레바논)까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하였다. 히타이트의 군대는 전쟁시에 전차를 잘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1] 기원전 1180년 멸망하고 이후 히타이트 제국은 분열되어 여러 독립된 도시 국가로 나뉘었으며, 기원전 8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이 도시 국가들을 네오히타이트(Neo-Hittite) 도시 국가라고 한다.

"히타이트" 라는 낱말은 구약성경의 "헷 사람들(sons of Heth, 헷 족속)"[2]에서 유래하였다. 19세기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와 동일시하였다. 현재는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인이 하투샤를 수도로 한 히타이트 제국(기원전 18세기경 ~ 기원전 1180년경)의 히타이트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의 신히타이트 도시 국가들(기원전 1180년경 ~ 기원전 8세기경)의 히타이트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Ancient Orient
고대 근동: 지도에서 히타이트("Hittites")는 아나톨리아("ANATOLIA")의 동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북서부에 위치한다
AlterOrient2
기원전 1400년경의 고대 근동: 히타이트 제국 (파랑, 기원전 1400년경은 히타이트의 최절정기였다), 아시리아 제국 (녹색), 고대 이집트 (노랑), 그리스 미케네 문명 (분홍)
Neo-hittites et arameens
기원전 1000년경~기원전 800년경의 신히타이트 도시 국가들과 아람인의 도시들

역사

Map Hittite rule en
수필룰리우마 1세무르실리 2세 당시의 히타이트 최대 영토

기원전 18세기경, 쿠샤라 왕 아나타스가 카파도키아 고원을 정복하였다. 히타이트 고왕국(古王國)의 조상은 라발나스인데, 그 아들 하투실리스는 하투사스를 수도로 정했다. 무르실리스 1세(Mur-silis Ⅰ, 기원전 1624 ~ 기원전 1594?)는 북시리아를 정복, 바빌론을 공략했다. 신왕국의 시조는 투드하리야스 2세로서 수필룰리우마스 1세(Suppiluliumas Ⅰ, 기원전 1380 ~ 기원전 1340?) 시대에 히타이트의 판도는 가장 커졌다. 히타이트인은 소아시아의 지배를 강화하여 미탄니를 속국으로 하고, 북시리아를 세력 아래에 흡수, 이집트 다음가는 대국이 되었다. 무와탈리스는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의 군대와 카데시에서 싸워서 격퇴했다(기원전 1286). 하투실리스 2세는 이집트와 화약(和約)을 맺어(기원전 1269) 오리엔트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동편에서는 아시리아에게 압박되고, 소아시아 서부에서는 프뤼기아가 대두하여, 그리스계 해상 민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1180년 히타이트는 멸망했다.

히타이트인

히타이트인은 기원전 3000년 초 소아시아에 침입하여, 하티인·루비아인·팔라인 등 원주민을 차차 정복, 아나톨리아 고원의 지배자가 된 인도·유럽계 민족. 처음 쿠샤라를 도읍으로 삼았으나, 뒤에 하투사스를 수도로 정했다. 하투사스는 20세기 초에 독일인 빙클러(H. Winckler)에 의해서 발굴되어, 대신전이나 성채(城砦)가 발견되었다. 왕실 기록문서고에서 히타이트어아카드어로 쓰인 점토판 문서 약 2만 매 이상이 출토되었다.

말과 전차

후르리인(Hurrians)에게 기르는 법을 습득한 히타이트인은, 말에 끌리게 한 6개의 바퀴살을 가진 전차를 이용하여, 미탄니군이나 이집트군과 싸웠다. 전차에는 마부와 활쏘는 병사가 탔다. 전쟁의 주된 목적은 포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히타이트왕 목록

히타이트 왕들의 순차와 연대는 조각 기록들에서 모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주어진 연대는 근사적이며 이웃나라의 알려진 연대표와 동기화에 의존한다. 대개 브라이스(1998)에 따랐다.

하티

Lion Gate, Hattusa 01
하투사의 사자 문, 터키의 보아즈쿄이
  • 팜바(Pamba) 기원전 23세기. - 하티왕
  • 피타나(Pithana) 이른 기원전 18세기. 쿠사라(Kussara)왕, 네사(Neša)정복자
  • 피유스티(Piyusti) 기원전 18세기. 하티(Hatti)왕, 아니타(Anitta)에 패배
  • 아니타(Anitta),피타나의 아들, 기원전18세기 중반, 쿠사라왕, 하투샤(Hattusa ) 파괴자
  • 투드 할리야(Tudhaliya)
  • 푸루갈마(PU-LUGAL-ma)

고왕국

  • 라바르나 1세(Labarna I) ,제위 기원전1680–기원전1650 . 전통적인 창시자, 전설적이다.
  • 라바르나 2세(Labarna II) (하투실리 1세Hattusili I) 제위 기원전1650– 기원전1620.
  • 하투사를 재점령한 첫 지배자
  • 무르실리 1세(Mursili I) 제위 1620–1590
  • 한틸리 1세(Hantili I) 제위. 1590–1560
  • 지단타 1세(Zidanta I) 제위. 1560–1550
  • 암무나(Ammuna) 제위. 1550–1530
  • 후지야 1세 (Huzziya I) 제위. 1530–1525
  • 텔레피누(Telepinu) 제위. 1525–1500

중간 왕국

  • 알루왐나(Alluwamna )
  • 타후르와일리(Tahurwaili )
  • 한틸리(Hantili) II
  • 지단타(Zidanta )II
  • 후지야(Huzziya) II
  • 무와탈리(Muwatalli) I

신왕국(제국)

같이 보기

각주

  1. Kate Santon: 《Archaeology,》 Parragon Books Ltd, London 2007
  2. 예를 들어, 창세기 23:3에 히타이트인들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공동번역: 아브라함은 시신 앞에서 물러나와 헷 사람들에게 가서 청하였다.
    가톨릭성경: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앞에서 물러 나와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개역한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표준새번역: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옆에서 물러나와서 헷 사람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KJV: And Abraham stood up from before his dead and spake unto the sons of Heth saying
    NIV: Then Abraham rose from beside his dead wife and spoke to the Hittites. He said,
    NASB: Then Abraham rose from before his dead, and spoke to the sons of Heth, saying,
    YLT: And Abraham riseth up from the presence of his dead, and speaketh unto the sons of Heth, saying,
고대 근동의 종교

고대 근동(古代近東, Ancient Near East)은 청동기 시대(기원전 3300~기원전 1300/1200)로부터 철기 시대(기원전 1300/1200~기원전 600) 초기까지 약 2천년간 이상의 기간 동안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고대 이집트 문명의 지역들을 포괄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중동 지역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고대 근동에는 많은 문화적 · 종교적 접촉들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에 비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리적으로 더 개방된 곳이어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다민족 문화로 발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전쟁과 사회적 불안 상태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외적인 힘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는 일도 계속하여 발생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고대 근동의 종교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이 지역의 종교들의 대다수는 많은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였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민족의 주요 신들은 서로 비슷한 경우가 많았으며 문화적 경계를 넘어 숭배되기도 하였다.고대 근동의 종교 중 다신교가 아닌 경우로는 마르둑교(Mardukites)와 아수르교(Ashurism)와 같은 초기 단계의 일신숭배와 아텐주의(Atenism)와 같은 일신교가 있었다. 일군의 학자들은 고대 근동의 종교들 간의 유사점은 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믿는데, 이러한 믿음을 패턴주의(Patternism)라 한다.중부와 서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시리아의 사람들, 즉 루비아어를 사용한 이들의 판테온은 고대 그리스 종교에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종교는 유대교와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0~330)의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끼쳤다. 다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 · 그리스의 종교적 전통은 기독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람세스 2세

람세스 2세(世)(Ramesses II, 1303년 ~ 1213년)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재위: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3년)이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해 번영하였다. 그는 호전적인 히타이트와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그 후 그들과 평화롭게 되었다. 람세 2세, 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었다. 람세스란 이름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라 메스 시스'의 그리스어 음이다.

리디아

리디아 (아시리아어 : 루두, 그리스어: Λυδία)는 서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역사상의 한 지방으로 터키의 현대 이즈미르 주, 마니사 주에 해당한다.

그 전통적인 수도는 사르디스였지만 리디아 왕국은 한때 서 아나톨리아 전체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리디아는 후에 로마 속주의 이름이었고 리디아에서는 주화가 기원전 660년경에 발명되었다.

역사적인 리디아의 경계는 수세기 동안 변하였다. 그것은 미시아, 카리아, 프리기아와 해안의 이오니아와 경계하였다.

그 후 알리아테스와 크로이소스 왕의 군사력으로 리디아는 제국으로 팽창하였는데 그 수도는 사르디스가 되었다. 사르디스는 리키아를 제외한 소아시아의 할리스 강 서쪽 모두를 통제하였다.

리디아는 원래의 크기로 결코 돌아가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 후 매산더는 그 남쪽 경계로 여겨졌으며, 로마 치하에서는 리디아는 프리기아와 에게해 연안의 미시아와 카리아 사이의 나라를 구성하였다.

리디아의 언어는 인도 유럽어족으로 루위어와 히타이트어와 관련되어있다.

리키아

리키아(그리스어: Λυκία, Lycia)는 오늘날 터키의 남동 해안의 안탈리야와 무글라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이다. 로마 제국 성립 후 속주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서는 리키아를 히타이트 연맹의 일부라고 한다. 리키아는 기원전 1250년경 아수와 동맹의 구성 국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루카'(Lukka)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후, 리키아는 독립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부상하였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리키아는 아테네의 판디온 2세의 아들인 리쿠스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이 영역은 한 나라로 통합되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이 굳게 결속한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트로이아 전쟁에서 리키아는 두 존경받는 전사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의 지휘 아래 트로이아 편에서 싸웠다고 한다.

다른 그리스 신화에는 리키아 왕국은 다른 사르페돈이 지배하였다고 한다. 그는 크레테에서 왔으며 미노스 왕의 형제이다. 사르페돈의 추종자들은 '테르밀라이'라 불리었으며 그들이 밀리안(Milyans)이라 불리는 민족을 정복하고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밀레토스의 창건 이야기와 더불어 크레테가 소아시아에 정착과 관련이 있음을 뜻한다. 리키아는 그리스 신화에 벨레로폰의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그는 결국 리키아 왕 이오바테스(또는 암피아낙스)의 왕좌를 계승하였다.

리키아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때 메디아의 하르파구스(Harpagus)는 키루스 대왕의 장군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정복하였다. 하르파구스의 후손이 기원전 468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때 아테네가 이들을 무너뜨렸다. 그 후 페르시아는 기원전 387년 다시 점령하였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지배를 유지하였다. 이후 리키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에 정복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4년에 이 곳에서 피살되었다. 서기 43년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리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병합하며 그것을 팜필리아와 통합하였다. 리키아는 결국 그리스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어 터키의 일부가 되었다.

20세기 초 그리스-터키 전쟁이 일어난 뒤 이 지역에서도 그리스와 터기의 인구 교환이 시행되었다. 오늘날 리키아는 터키의 국내외 관광객이 몰리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리키아는 트리밀리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것은 파타라 발굴에서 고대 도로 표지판에 발견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디르밀이라는 터키 마을이 고대의 트리밀리 즉 리키아로 판명되었다.

2세기의 대화록에서 에로테스는 리키아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어버려 그들의 유적보다는 역사가 흥미롭다고 한 바 있으나, 많은 유물들이 리키아 특유의 절벽 측면의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서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리키아는 여신 레토와 그녀의 쌍둥이 아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숭배의 중심이었다.

마리 (수메르)

마리(Mari)는 텔 하리리에 위치한 시리아의 고대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 서쪽 제방의 현재의 아부 카말에서 북서로 11km 떨어져 있으며 시리아의 데이르-에즈조의 남동쪽 약 120km에 위치한다.

기원전 5000년부터 거주자가 있었다고 생각되나 기원전 2900년 무렵에 홍수에 잠겨 유물들이 소실되었다. 기원전 1800년경부터 아시리아의 식민지로 전락해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기원전 1759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가 마리를 포함한 아시리아의 주요 식민지들을 약탈할 때,이 시기에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무너져내린 마리를 통과하여 하란으로 갔다고 추정된다.

미탄니

미탄니(Mitanni) 또는 하니갈바트(Hanigalbat)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1300년경 동안 고대 근동의 지금의 시리아 북부 지역과 아나톨리아 남동부 지역(대략 오늘날의 쿠르디스탄 지역에 해당한다)을 지배하였던 온건성향의 국가이다. 미탄니 왕국은 중앙아시아의 아리아인계의 지배 계층이 후르리인 민중을 지배하는 형태로 성립되었으며, 히타이트 제국에 의해 아모리인계의 바빌론(Amorite Babylon)이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져 메소포타미아에 권력 공백이 생기자 이를 기회로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미탄니의 역사의 초기에서 미탄니의 주요 경쟁자는 고대 이집트의 투트모세 왕조, 즉 이집트 제18왕조(1550?~1292? BC)의 파라오들이었다. 그러다가 히타이트 제국(18세기~1180 BC, 전성기는 기원전 14세기)이 강성해지면서, 미탄니와 고대 이집트는 히타이트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미래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하였다. 히타이트 제국과 마찬가지로 미탄니의 최절정기도 기원전 14세기였는데, 당시에 미탄니는 카부르 강 상류에 위치한 수도 와슈칸니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군대 주둔 기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미탄니는 히타이트 제국에 굴복당하였으며, 이후 히타이트의 지원을 받은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하였다.

미탄니는 후르리어를 사용하였는데 후르리어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두 어족인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 둘 모두와 연관성이 없는 후르리우라르투어족에 속한다. 고대 근동에 미친 미탄니의 영향은 후르리어로 된 지명과 인명이 사용된 것과 그리고 미탄니의 독특한 도기 양식이 시리아를 통해 퍼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빌레지크주

빌레지크 주(터키어: Bilecik ili)는 터키 중서부에 위치한 주로, 마르마라 지역에 속한다. 주도는 빌레지크이며 면적은 4,307km2, 인구는 198,809명(2007년 기준), 자동차 번호는 11번, 시외전화 지역번호는 0228번이다. 서쪽으로는 부르사 주, 북쪽으로는 코자엘리 주와 사카리아 주, 동쪽으로는 볼루 주, 남동쪽으로는 에스키셰히르 주, 남쪽으로는 퀴타히아 주와 접하며 8개 군을 관할한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히타이트(기원전 1400년~1200년)와 프뤼기아(기원전 1200년~기원전 676년), 뤼디아(기원전 595년~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46년~기원전 334년), 로마 제국(74년~395년), 비잔틴 제국(395년~13세기 말)의 지배를 받았다. 1281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신화

신화(神話, myth)는 한 나라 혹은 한 민족, 한 문명권으로부터 전승되어 과거에는 종교였으나, 더 이상 섬김을 받지 않는 종교를 뜻한다. 신화는 과거에 종교로서 떨쳤던 영향만큼이나 다양한 문화를 파상시켰으며, 이는 건축, 문학, 예술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에까지 자취를 남겼다. 한편 신화와 같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전설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전설은 신화와 비교하여 볼 때 이야기의 주제가 서로 독립된 것이 보통이며 그리고 그 짜임새에서 단편적인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신화는 우주론을 포함하며 종교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나톨리아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어: Anadolu, 그리스어: Aνατολή, 문화어: 아나또리아)는 서남아시아의 한 지역으로, 오늘날 터키 영토에 해당하는 반도(半島)를 말한다. 아나톨리아는 이전에는 소아시아(Asia Minor, 그리스어: Μικρά Ασία)라고 불렸다. 한글성서에서는 소아시아를 아시아라고 번역했다. 이 지방의 북쪽에는 흑해, 북동쪽에는 캅카스, 남동쪽에는 이란 고원, 남쪽에는 지중해, 서쪽에는 에게 해가 있다. 아나톨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문명의 터전이었다. 아카드, 아시리아, 히타이트, 아르메니아, 로마,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에 있었던 중요한 나라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문화적 교류와 충돌의 장(場)이 된 곳이기도 하다.현재 터키령의 아시아 측 흑해와 에게 해, 동지중해로 둘러싸여 서쪽으로 돌출한 대반도이다.

지리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삼면은 흑해, 에게 해, 지중해와 접하고 있고, 지역의 대부분은 넓은 고원 지대이다. 아나톨리아의 북쪽과 동쪽에는 산이 더 험하다. 흑해와 에게 해가 이어지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사이에 마르마라 해가 있다. 마르마라 해 북쪽은 유럽 대륙이며, 보스포루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던 지점이다.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 덕분에 인구 역시 매우 다양하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주요 무슬림 소수 집단을 이루고 있는 쿠르드족이나 아나톨리아 남쪽에 주로 사는 아랍인 외에도 아나톨리아 각지에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유대인, 조지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이 소수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 Anatole <태양이 솟는 곳>에서 유래되었다.

아다나

아다나(Adana)는 터키 아다나 주의 주도로 인구는 1,530,257명, 면적은 1,945km2이다. 터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대부분의 터키인에게 아다나는 케바브, 살감, 코튼, 오렌지와 매우 더운 기후를 의미한다. 아다나는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언급되지만 지리적인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투사(현재의 보가즈칼레)에서 발굴된 히타이트의 카바 비석에는 키주와트나가 기원전 1335년 히타이트의 보호 아래에 아다나를 지배한 첫 왕국이었다. 그 당시에 도시의 이름은 "우루 아다니야"였으며 거주자들은 다누나라 불렸다. 기원전 1191-1189년에 히타이트의 붕괴와 함께 시작하여 서쪽의 작은 왕국들이 평원의 지배권을 두고 침입하였다. 기원전 9세기의 큐아시리아인, 킬리시아 왕국,기원전 6세기의 페르시아인 그리고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 등이 있었다.

폼페이 시대에 도시는 킬리키아 해적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수세기 후에 로마의 동쪽으로 가는 군사 도로의 경유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분할된 이후에 그 곳은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줄리안 시대에 개발되었다.

대형 교량과 도로, 정부 청사와 관개 시설 등의 건설로 아다나와 킬리키아는 영역의 가장 개발된 무역 중심이 되었다.

우라르투

우라르투는 현재 터키 동부와 아르메니아에 걸쳐 있던 고대 왕국이다.

우라르투는 기원전 860년에서부터 기원전 585년까지 존속하였으며, 후기 청동기 시대 나이리 부족에서 부상하였다. 우라르투 왕국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코카서스 산 사이의 후에 아르메니아 고원으로 알려진 산악 고원에 있었다.

터키의 역사

이 문서는 기원전 6,50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터키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하티, 히타이트, 프리기아, 우라르투, 리키아, 리디아, 이오니아,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제국, 오스만은 터키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고대 유적은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각각의 문화의 특징이 존재한다.

텔레피누

텔레피누는 히타이트 왕명이었다.(기원전 1500년경) 그의 치세 초기 히타이트 제국은 그들의 핵심 영토로 수축하여 하투실리 1세와 무르실리 1세의 이전 시기에 그들의 점령지 모두를, 즉 서쪽은 아르자와 동쪽은 미탄니 북쪽은 카스카, 남쪽은 키주와트나를 잃고 오래되었다.

텔레피누는 키주와트나의 후르족과 연맹을 형성하여 미탄니의 후르족으로부터 기반을 약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끝남과 더불어 히타이트 제국은 일시적인 암흑기인 중왕국으로 접어들었다. 약 70년간 지속되었다. 그 시절은 기록이 너무 부족하여 많은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

투트모세 3세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 ~ 기원전 1425년)는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재위: 기원전 1479년 ~ 기원전 1425년)로, 투트모세 2세의 아들이다. 54년에 달하는 긴 재위기간 중 반에 가까운 21년을 계모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파라오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 누비아를 필두로 대규모의 군사 정복을 통하여 이집트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17회의 원정을 했고, 그 결과 미타니, 히타이트,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우가리트, 비블로스, 야흐베, 누비아 등을 지배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20세기 역사가들에 의해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 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트로이아

트로이아(고대 그리스어: Τροία, 라틴어: Trōia)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언급되는 지명이다. 호메로스는 Τρωία 외에 이오니아방언 Τρωίη를 더러 쓰기도 하며 혹은 시운 때문에 Τρωες라고 쓰기도 한다. 호메로스는 자주 트로이아를 일리오스 (Ίλιος 혹은 드물게 Ίλιον)라고 부르기도하며 라틴어로는 일리룸(라틴어: Ilium)이라고 쓰인다. 영어식 발음을 따서 트로이(Troy)라고도 하며, 표준어도 트로이로 등재되어 있다.트로이아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프리기아

고대의 프리기아(그리스어: Φρυγία, Phrygia)는 아나톨리아의 중서부에 있었던 왕국이다. 프리기아인들은 초기 역사에 브루게스(브리게스)라는 이름으로 마케도니아 지방에 살았다. 그들은 그리스어를 민족어로 채용하기 전에 프루게스로 진화하였다. 여러 민족들이 그곳에서 비 그리스어계 또는 그리스어 이전의 인도 유럽어에서 나온 발칸어를 사용하거나 초기의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트로이 번영 시대에 브루게스의 일부가 트로이의 보호 아래 트로이 연맹 아나톨리아로 이동하였다. 트로이어는 사멸하여 결과적으로 프리기아어와의 정확한 관계와 프리기아 사회와의 친화도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비슷하게 이동의 연대와 프리기아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1200년에 히타이트 제국이 끝났다. 프리기아는 현재의 앙카라가 있는 할리스 강이 있는 곳에 위치하였고, 히타이트 소속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히타이트 권력의 중심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프리기아 국가는 기원전 8세기에 고르디움을 수도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 동안 프리기아인은 동쪽으로 팽창하여 후르리인의 후손이며 이전 히타이트의 경쟁 상대였던 우라르투와 부딪혔다.

기원전 690년 한때 프리기아 왕국은 이란의 킴메리아 침입자로 넘쳐났고 그 후 이웃 리디아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 그것이 키루스의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공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알렉산더와 그의 계승자의 제국은 페르가몬의 왕에 의해 점유되었고 결국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프리기아어는 서기 6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발칸 반도에서 브루게스는 그리스 마케도니아에 흡수되기 전에 오래 버티었다.

하투실리 3세

하투실리 3세는 히타이트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제위: 기원전 1267년~기원전 1237년)이며, 신 히타이트 (소위 히타이트 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이다. 그는 무르실리 2세의 말자(末子)이다. 무르실리는 하투실리를 사무하의 사우스가의 제사장으로 임명하였고 하투실리는 죽을 때까지 사무하의 이쉬타르에 충성하였다.

그의 형 무와탈리 2세는 그의 자리를 타르훈타사로 옮기고 그를 하투사의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하투실리는 히타이트 군대의 사령관이었는데 기원전 1274년 유명한 카데쉬 전투에서 시리아로 원정해온 이집트를 격파하였다. 하투실리는 총독으로서 역시 네릭을 다시 정복하였고 그 폭풍신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하투실리는 그의 장남이며 태자에게 이 성취의 영광에 네리카일리(네릭의 카일)라는 이름을 주었다.

형인 무와탈리 2세가 사망한 뒤 그 서자(庶子)로써 즉위한 조카 무르실리 3세(본명은 우르히-테슙)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던 숙부를 경계하였으므로, 일부러 수도를 하투사로 다시 옮기고 하투실리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이후 무르실리는 그를 네릭의 분봉왕위에서마저 폐위하여, 결국 7년에 걸친 내전을 발생시켰다. 승리한 하투실리는 조카를 이집트로 추방하였다. 하투실리는 형의 차남인 울미-테슙의 이름을 쿨룬타(Kulunta) 라 바꾸고 (또는 그녀를 쿠룬타에게 시집보내고) 쿠룬타를 추방한 무르실리 3세 대신에 타르훈타사의 분봉왕을 임명하였다. 이후 하투실리는 어린 아들 투드할리야 4세를 대신에 태자로 승격시켰다.

하투실리와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모델에 기초한 기록된 평화 조약을 봉인하였다. 그것은 이집트의 기념비적인 사본에 따르면 역사상 최초의 잘 알려진 조약이 되었는데 두 경쟁하는 제국간의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달성하였다. 람세스는 하투실리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이집트 식 이름이 마아토르네페루레로 알려졌다. 수년 후 그는 다른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였다.

후르리인

후르리인은 고대 소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동양과 서양의 경계의 지역에 기원전 2500년경부터 살았다. 그들은 아마도 코카서스에 근원이 있었으며, 명확하지는 않지만 북쪽에서부터 진입하였다. 그들의 알려진 고향의 중심은 카부르 강 계곡의 수바르투이며, 후에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전역에 걸쳐있는 작은 왕국의 지배자로 스스로 일어났다. 후르리인이 세운 가장 강력한 국가는 미탄니 제국이었다.

후르리인은 히타이트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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