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야 연합왕국

카스티야 연합왕국(스페인어: Corona de Castilla)은 중세 및 근대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1230년 후사가 없어진 레온 왕국의 왕위에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3세가 즉위하면서 탄생했다. 가톨릭 군주들의 결혼을 통해 아라곤동군 연합을 이루었다가,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펠리페 5세가 아라곤을 완전히 합병하면서 현대 스페인 왕국의 토대를 이루었다. 카스티야는 왕위 계승 전쟁 후에도 공식적으로 해체되지 않았으나, 역사가들은 물론 당대의 스페인 사람들도 이후의 왕국을 에스파냐라고 불렀다.

카스티야 연합왕국
스페인어: Corona de Castilla
아스투리아스어: Corona de Castiella
라틴어: Corona Castellae

 

 

1230년1715년
국기
국기
문장
문장
Crown of-Castile 3
수도부르고스, 톨레도, 마드리드
정치
공용어스페인어, 라틴어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역사
 • 페르난도 3세의 레온 국왕 즉위1230년
지리
1516년 어림 면적380,000 km2
인구
1516년 어림4,500,000명
기타
국교로마 가톨릭
통화스페인 레알
현재 국가스페인의 기 스페인
지브롤터의 기 지브롤터

레온과 카스티야

레온 왕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후신이며, 레온이 성립될 당시 카스티야는 레온 왕국 휘하의 한 영지였다. 10세기 경 레온은 한때 나바라 왕국에 카스티야 지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11세기에 카스티야가 독립하여 독자적인 왕국이 되었다. 레온과 카스티야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두 차례 연합왕국을 이루었다.

1198년 카스티야의 공주 베렝겔라는 사촌오빠인 레온 왕 알폰소 9세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페르난도 3세를 낳았다. 1217년, 어머니 베렝겔라에게서 왕위를 이양받은 페르난도 3세는, 1230년 아버지 알폰소 9세의 사망으로 레온의 왕위도 이어받았다. 이후 두 왕국은 동군 연합으로서 카스티야-레온 연합왕국이 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의회를 카스티야에 통합시켜 두 왕국의 결합을 공고히 하였다. 이때부터 공문서를 카스티야어로 작성하면서, 카스티야어가 레온어, 바스크어, 갈리시아포르투갈어 등을 제치고 점차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트라스타마라 왕가

왕위 계승 전쟁

알폰소 11세의 사후 두 왕자 페드로와 엔리케 간에 카스티야의 왕좌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페드로가 알폰소 11세의 적자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사생아였던 트라스타마라 후작 엔리케가 그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다. 페드로는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와 연합하여 엔리케를 몰아냈다. 그러나 페드로가 에드워드에게 약속한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에드워드는 카스티야를 떠났고, 프랑스로 도망쳤던 엔리케가 이를 틈타 다시 카스티야로 돌아와 전쟁을 계속했다. 페드로는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했고, 엔리케 2세가 왕위에 올랐다.

1371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동생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페드로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였다. 1386년 곤트의 존은 아내 콘스탄사를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다. 엔리케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안 1세는 곤트의 존과 합의를 맺어, 아들 엔리케 3세를 존의 딸 캐서린과 결혼시켰다. 이 결혼으로 왕위 계승 전쟁이 일단락되고,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지배가 공고해졌다.

아라곤 연합왕국과의 관계

엔리케 3세 사후, 엔리케 3세의 동생인 안테케라의 페르난도는 왕관을 거절하고, 엔리케 3세의 비 캐서린과 함께 엔리케의 아들 후안 2세의 섭정이 되었다. 1412년 카스페 합의로 페르난도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한편 섭정이었던 캐서린이 죽자, 아직 14세였던 후안 2세는 궁정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귀족 알바로 데 루나에게 섭정을 맡겼다. 이 무렵 카스티야의 소귀족들과 가톨릭 교회는, 카스티야의 궁정에 영향력을 넓히던 아라곤의 왕자들과 그에 연합한 카스티야의 대귀족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알바로 데 루나는 소귀족들과 연합을 맺고 아라곤의 왕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그들을 카스티야에서 몰아내었다.

제 2차 왕위 계승 전쟁

엔리케 4세는 아버지 후안 2세의 전쟁으로 박살난 귀족들과의 관계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 여왕 후아나가 낳은 공주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가 카스티야 귀족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의 불륜으로 낳은 아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귀족들은 후아나 공주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왕의 배다른 동생인 아스투리아스 공작 알폰소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알폰소가 사고로 죽은 뒤에는, 배다른 동생인 이사벨 1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가톨릭 군주

La Rendición de Granada - Pradilla
그라나다 탈환

1469년 이사벨 1세아라곤의 왕세자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의 바야돌리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479년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의 왕위에 오르면서,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일시적 연합을 이루었다. 교황은 이들에게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엔리케 4세는 이복동생 이사벨을 후계자로 삼을 때, 자신이 정한 귀족과 결혼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아라곤이 아닌 포르투갈이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싶어 했던 엔리케 4세는,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이사벨의 왕위 계승권이 무효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딸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후계자로 삼았다. 1474년 엔리케 4세가 죽었을 때 이사벨과 후아나의 지지자 간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이사벨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카스티야의 왕위에 올랐다.

Christopher Columbus9
콜럼버스와 가톨릭 군주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두 왕은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불렸으나, 이사벨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페르난도는 아라곤 연합왕국을 각각 다스렸다. 두 연합왕국의 통치기구 또한 별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카스티야는 아라곤에 비해 3배의 영토와 4배 이상의 인구를 갖고 있었으므로, 카스티야가 아라곤에 비해 지배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레콘키스타의 결과로 카스티야 귀족들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가톨릭 군주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지역 치안조직인 "성스러운 형제단"을 창설했다. 또한 사적 전투를 금지하고 레콘키스타로 얻은 새 영토의 총독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각 도시에는 국왕이 임명한 대표가 파견되어 도시 행정을 감독하였다.

두 국왕은 1487년에서 1497년에 걸쳐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했다. 1492년 1월 2일에는 마지막 이슬람 도시인 그라나다를 함락하고 알람브라 궁전에 입성하여, 레콘키스타가 완료되었다. 또한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두 국왕의 후원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신대륙 정복이 시작되었다.

제국과 위기

후아나 1세

1504년 이사벨이 죽고 딸 후아나가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물려받았다. 후아나에게는 정신병이 있어, 그녀의 별명은 미친 후아나(스페인어: Juana la Loca)였다. 이사벨은 죽기 전 그녀가 "책무를 다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후아나의 남편인 아우스트리아 대공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귀족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후아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섭정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다.

1506년 비야파필라의 합의로 페르난도는 아라곤으로 돌아갔고, 펠리페가 아내 후아나와 함께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또한 이 합의로 페르난도는 신대륙에 대한 권한을 모두 펠리페와 후아나에게 넘겨, 왕국의 수입 가운데 절반을 포기했다. 1507년 펠리페가 죽자, 페르난도는 다시 섭정으로서 카스티야에 돌아왔다. 1510년에는 후아나의 정신병이 심해져 토르데시야스의 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1512년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동맹을 맺고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여 병합하였다. 나바라 영토 가운데 피레네 산맥의 남부가 카스티야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카를로스 1세

Los Comuneros de Castilla en el Patíbulo
"코무네로스" 파디야, 브라보와 말도나도, 1860년. 안토니오 기스베르트.

카를로스 1세는 부모로부터 카스티야, 아라곤 및 신성 로마 제국을 상속받았다.

  • 1506년 아버지 펠리페 1세에게서 네덜란드를 상속받았다.
  • 1517년 외조부 페르난도 2세가 죽었을 때, 아라곤과 카스티야, 그리고 신대륙을 어머니 후아나와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아나는 여전히 유폐되어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두 연합왕국을 단독 통치하게 되었다.
  • 1519년 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죽었을 때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되었다.[주 1]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네덜란드 헨트에서 태어난 그는 카스티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게다가 카스티야에 도착하기도 전에 카스티야 왕국의 금고를 사용하고, 플랑드르 출신을 요직에 앉히는 등의 행동으로 카스티야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카스티야인들은 카스티야에서 태어난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했다.

1518년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카스티야 의회에서 왈롱 출신인 장 드 소바쥬가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외국인을 의장에 앉히는 것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의회는 부르고스 대표 후안 데 주멜의 주도로 왕이 카스티야 법을 지키고 카스티야어를 배울 것, 그리고 외국인들을 요직에서 해임시킬 것을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맹세하고서야 의회의 부조금 60만 두카트를 받을 수 있었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신성 로마 황제가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스페인의 자금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카스티야에서의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입된 금과 은, 그리고 광대한 영토로 인해 카스티야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카스티야 귀족들은 조국이 제국에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끼고 격렬히 저항했다. 1520년 톨레도 의회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의회는 국왕에게 부조금을 지급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라코루냐 의회는 많은 의원들이 매수당하고, 일부 의원들은 등원을 거부한 상태에서 부조금이 승인되었다. 카스티야인들은 부조금 승인에 투표한 의원들을 습격하고 집을 불태웠다. 1520년 카를로스가 카스티야를 떠났을 때 코무네로스 전쟁(시민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시민군은 이듬해 제압되었고, 의회의 권한은 축소되었다.

펠리페 2세의 제국 경영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로스 1세의 정책을 유지했으나,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제국을 운영했고, 마드리드에서 모든 정무를 처리했다.

카를로스 1세의 막대한 지출은 카스티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펠리페 2세 시대에는 이 지출이 4배로 늘었다. 그는 기존의 세금을 늘리는 한편 1567년에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럼에도 그의 궁정은 4차례나 파산하였고, 각 도시에도 큰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들의 산업화가 늦어지게 되었다.

한편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던 펠리페는 1567년 모든 모리스코(스페인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이슬람 관습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법을 시행했다. 이에 저항해 모리스코 반란이 일어났으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제압되었다.

"작은 합스부르크" 왕국

펠리페 2세 시대까지 정부기관의 요직은 잘 교육받은 하급 지주 계층이 차지했다. 펠리페 2세는 알칼라 대학과 살라망카 대학 출신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펠리페 3세 시대부터 다시 귀족들이 국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4세 시대에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수입 감소와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또다시 파산의 위기에 처했다. 펠리페 4세가 총애한 중신 올리바레스 백작은 14만명 규모의 예비군을 창설하고 각 지역이 각자 비용을 지출하는 등 연합 왕국을 구성하는 각국의 정치적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659년 올리바레스 백작은 몰락하고 루이스 멘데즈 데 하로가 펠리페 4세의 총신이 되었다. 펠리페 4세가 죽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했던 카를로스 2세가 즉위하자 스페인은 신하들 간의 정치 투쟁으로 침체기를 겪었다. 평생 프랑스오스트리아에 휘둘리던 카를로스 2세 사후 스페인의 왕좌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스페인은 단일한 스페인 왕국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1][2]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영토

스페인

해외

북반구

남반구

  • 페루 부왕령 (1542년 이후)
  • 칠레 총독령 (1541년 이후)
  • 누에바그라나다 왕국 (1538년 이후)
  •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1717-1724, 1739년 이후)
  • 베네수엘라 총독령(1777년 이후 자치령으로 병합)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1776년 이후)

같이 읽기

각주

  1. 카를로스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참고자료

  1. Charles Arnold-Baker (2001). “The Companion to British History” (영어) 2판. Routledge. 1161쪽. ISBN 9780415185837.
  2. Vicent de Melchor, Albert Branchadell, Vicent de Melchor (2002). “El catalán: Una lengua de Europa para compartir” (스페인어). Univ. Autònoma de Barcelona. 106–107쪽. ISBN 9788449022999.
나바라 정복

나바라 정복(Nafarroako konkista)은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 페란도 2세가 시작하여 1512년부터 1524년까지 길어진 여러 군사작전 끝에 카를 5세 시기에 완료되었으며, 반면 피레네 산맥의 북쪽의 나바라는 1528년까지 전쟁이 지속됐다. 페란도는 1512년에 아라곤의 왕이자 카스티야의 섭정이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511년 말에 프랑스에 맞서 신성 동맹을 창설했고, 나바라 왕국을 중립을 유지하려했다. 페란도는 이를 나바라를 공격할 이유로 삼아, 나바라의 잠재적 보호자이던 프랑스가 잉글랜드, 베네치아, 페란도의 이탈리아 병력에게 집중을 한 동안에 정복하였다.

카스티야의 침입 (1512년)이 있고나서, 나바라령 이베리아에 대한 몇 차례 탈환 시도가 이뤄졌고, 특히 1516년에 별 열의가 없던 탈환 시도와 1521년 완전한 열의의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의 시도가 있었다. 이 모든 공격들은 스페인에게 격퇴당했고, 1528년 피레네 북쪽 지역에서 스페인 군대가 저지 나바라를 포기하면서 교전이 멈췄다. 1529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맺은 캉브레 조약으로 피레네 산맥을 따라 나바라 분할을 하기로 결정했고, 저지 나바라에서 살아남은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친밀한 관계를 보인 알브레 가문이 그들의 베아른 공작 영지와 합쳐 통치했다. 나바라 왕국은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됐다 (명목상으로는 1790년).

랭커스터 전쟁

랭커스터 전쟁(Lancastrian War)은 백년전쟁의 제3기로, 1415년-1453년에 해당한다.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노르망디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389년 캐롤라인 전쟁이 끝나고 비교적 길었던 휴전기 이후 개전되었다. 헨리 5세가 죽은 뒤 그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이 잉글랜드군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고, 잉글랜드 국왕이 파리에서 대관식까지 했다. 그러나 그 시점 이후 잔 다르크, 라 이르 등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역공이 시작되었고 1429년 샤를 7세가 랭스의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1453년 잉글랜드가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이후 잉글랜드 왕가의 유럽 대륙 영지는 칼레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마저도 1558년 프랑스에 함락된다(칼레 공방전 (1558년)).

1453년의 카스티용 전투가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은 1475년 피퀴그니 조약을 맺을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 잉글랜드 및 그 후신인 브리튼 왕국은 1801년까지 프랑스 왕위를 요구했다.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스페인어: Barcelona, 문화어: 바르쎌로나)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부터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과 접경지역을 아우르는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인구는 1,620,343명(2018년)이고 면적은 101.3 km²이다. 도시의 명칭은 고대 페니키아어인 '바르케노(Barkeno)'에서 유래하였다(또는 B.C. 3세기경 스페인 식민지를 개척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가문의 성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1992년 하계 올림픽이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와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년 ~ 1714년)에서 유럽의 주요 열강들은 힘을 합쳐 프랑스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려는 것을 막아 유럽의 힘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북아메리카의 앤 여왕 전쟁(Queen Anne's War)을 포함한 유럽의 주요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빌라르 공작, 스튜어트 왕가의 지지자 베릭 공작, 말버러 공작, 사보이 외젠 공작 등 뛰어난 장군들의 군사적 지도력이 두드러졌다.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가 사망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인 그의 모든 영토를 ―스페인의 공주이자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의 요구에 따라―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Philip, duc d'Anjou)에게 물려주면서,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재위 1700~24, 1724~46)가 되었다. 전쟁은 스페인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가 스페인 왕위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그의 영토확장을 위한 공세를 강화했을 때 다른 유럽 국가(영국을 주도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 역시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측에 참여하였다. 다른 국가들도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거나, 지금 소유하고 있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전쟁은 유럽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지 주민들이 프랑스 식민지 주민(corsairs)과 스페인령인 남미 북안(Spanish Main)에 거점을 둔 사략선, 해적선과 싸운 앤 여왕전쟁으로 알려진 전투들이 북아메리카에서도 벌어졌다. 이들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40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1713)과 라슈타트 조약(Rastatt 1714년)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들로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좌를 지켰으나, 프랑스의 왕위는 계승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두 왕국이 합쳐질 위험은 사라졌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이 소유한 영토의 대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중부 유럽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는 종결되었으며,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 대한 생각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언급된 이후부터 국제적인 질서의 일부가 되었다.유럽에서의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다른 중요한 전투와 함께 주로 스페인과 중서부 유럽(특히 저지대 국가)에서 벌어졌다. 외젠 공작과 말버러 공작은 스스로를 저지대의 군사령관으로 생각했다.

스페인 제국

스페인 제국(스페인어: Imperio Español)은 스페인이 한때 전 세계적 패권을 이룩했던 역사상의 제국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그 영토는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이르렀다. 스페인은 20세기 초반까지 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1492년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재정복)로 통일 왕국을 세웠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처음으로 에스파냐 탐험대를 이끌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다. 신세계는 스페인 제국의 관심 지역이 되었다.

대항해시대에 스페인은 카리브 제도에 정착했으며, 이윽고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본토의 아스텍과 잉카 같은 토착 제국들을 무너뜨렸다. 이후 원정대들이 오늘날 북아메리카 캐나다에서 남아메리카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까지 진출하여 제국을 세웠다. 스페인의 세계 일주 탐험대는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시작하여, 1522년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끝마치면서 콜롬버스가 바라던 아시아로 가는 서쪽 항로를 개척했으며, 극동 지역에도 스페인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괌, 필리핀과 주변 섬들에 식민지를 세웠다. 이 황금 시대에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의 거대한 땅과 더불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이탈리아 대부분, 독일 일부, 프랑스 일부,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의 대서양 사이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온갖 교역물 가운데 해마다 에스파냐 보물 함대(서인도 함대 Flota de Indias)가 본국으로 운반하던 아메리카의 귀금속도 있었다. 마닐라 아카풀코 함대(Galeones de Manila-Acapulco)는 태평양을 건너 정기적으로 운항하며 필리핀과 아메리카를 연결해 주었다. 스페인의 풍부한 무역 덕분에 스페인 해군은 강화되어 유럽과 지중해의 스페인 왕국을 보호했다. 스페인의 일부 유럽 영토는 1713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으로 잃기도 했으나, 해외의 거대한 영토는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스페인은 대부분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었고 1810년부터 1825년까지 아메리카에서 여러 독립 운동이 일어나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연쇄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신생 공화국들이 독립하였다. 1830년 이후 영토는 쿠바, 푸에르토 리코, 필리핀과 그 외 에스파냐 동인도(Indias Orientales Españolas)만 남았으며, 1898년까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다가, 상당수 영토는 미국-에스파냐 전쟁으로 미국에 병합되었다. 1899년 남은 태평양 섬들은 독일에 매각되었다. 공식적인 스페인 제국의 종결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식민지 할양으로 보고 있지만, 서사하라, 적도 기니는 20세기 중반까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제국

식민제국(植民帝國, 영어: Colonial empire)은 19세기~20세기의 열강들을 일컽는 말이다.

에르난도 데 소토

에르난도 데 소토(스페인어: Hernando De Soto, 1495년경~1542년 5월 21일)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탐험가이자 콩키스타도르로 중앙아메리카와 페루의 정복에 참여하고 미시시피 강을 발견하였다.

옛 나라 목록

옛 나라 목록에서는 인류 역사상 과거에 존재했던 국가, 국제 기구 또는 영토를 점유한 게릴라, 정부, 정권, 테러 조직, 망명 정부, 부대 그리고 무장단체 등을 기술하였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국가는 나라 목록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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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카스티야 왕국(스페인어: Reino de Castilla)은 중세 유럽, 이베리아 반도 중앙부에 있었던 왕국이다. 레콩키스타에서 주도적 역할을 완수하였으며, 훗날 아라곤 왕국과 통합하여 통일 스페인 왕국의 핵심부가 되었다.

캐롤라인 전쟁

캐롤라인 전쟁(Caroline War)은 백년전쟁의 제2기로, 1369년-1389년에 해당한다.

1369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를 파리로 소환했다. 흑태자는 거부했고, 이에 샤를 5세가 전쟁을 선포했다. 샤를은 에드워드 전쟁 말기 브레티니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계자 샤를 6세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와 1389년 휴전했다. 이번 휴전은 비교적 오래 지속되어 1415년 제3기인 랭커스터 전쟁이 개전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영어: 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라틴어: Christophorus Columbus 크리스토포루스 콜룸부스[*], 스페인어: Cristóbal Colón 크리스토발 콜론[*], 포르투갈어: Cristóvão Colombo 크리스토방 콜롬부[*], 1450년 또는 1451년 제노바 ~ 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트라스타마라가

트라스타마라 가문(Casa de Trastámara)는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 및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지배한 일족이다.

시조는 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2세로, 그가 카스티야의 군주로 즉위하기 전 트라스타마라 백작이었던 것에서 가문의 이름이 유래했다.

엔리케 2세는 알폰소 11세의 서자로, 이복동생 페드로를 쓰러뜨리고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다. 그 후손인 엔리케 3세의 동생 페르난도는 외삼촌 마르틴 1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1412년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 아들인 알폰소 5세는 나폴리를 지배했으며, 그의 사후 나폴리를 제외한(나폴리 왕국은 알폰소 5세의 서자 페르디난도 1세가 물려받았다)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동생 후안 2세가 물려받았다. 후안 2세의 아내는 나바라 왕국의 여왕 블랑슈 1세로 후안 2세는 나바라의 왕위도 계승했다.

가톨릭 군주로 불리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왕 페르난도 2세의 결혼 및 정복활동으로 이들 영토는 점차 통합되기 시작했다.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가 점령되고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스페인 왕국이 탄생하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외손자인 카를 5세는 두 사람에게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비롯한 이베리아 반도와 해외 식민지를 물려받았으며 조부로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물려받았다. 카를 5세 외에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남자 후계자는 없었기 때문에 이후 트라스타마라 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흡수되었고, 스페인의 왕위는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물려받았다.

페란도 2세

페란도 2세(스페인어: Fernando II de Aragón y V Castilla la "el Católico", 아라곤어: Ferrando II d'Aragón y V de Castiella "o Catolico", 카탈루냐어: Ferran II d'Aragó i de V Castella "el Catòlic", 바스크어: Errando II.a Aragoikoa eta V.a Gaztelako "Katolikoa", 1452년 3월 10일 ~ 1516년 6월 23일)는 1468년부터 시칠리아의 군주 피르디난누 2세, 1479년부터 사망할때까지의 아라곤의 군주이다. 별명은 카톨릭왕. 이사벨 1세와의 혼인으로, 1474년부터 그녀가 사망한 1504년까지 카스티야의 군주 페르난도 5세이기도 하다. 그는 1508년부터 그가 사망할때까지 딸이자 후계자인 후아나 1세의 카스티야 섭정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인 1504년에는 나폴리의 군주 페르디난도 3세가 되었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영구적으로 다시 합켰고 이는 1458년 이래로 처음이였다. 1512년 그는 정복을 통해 나바라의 군주가 됐다.

페르난도 2세는 오늘날 신대륙 탐험을 주선한 것으로 잘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와 이사벨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1차 항해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 해에 또한 그라나다 토후국과의 마지막 전쟁을 벌여,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최후의 이슬람 국가를 무너트리고,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레콩키스타를 완료해냈다. 그가 사망한 후, 뒤를 이은 후아나는 그녀의 아들 카를로스와 함께 포르투갈을 제외한 모든 이베리아의 왕국들을 공동 통치했다.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독일어: Ferdinand I, 1503년 3월 10일 ~ 1564년 7월 25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556년 ~ 1564년)이다. 보헤미아의 국왕 페르디난트 1세(체코어: Ferdinand I.),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헝가리어: I. Ferdinánd, 슬로바키아어: Ferdinand I. 페르디난트 1세, 크로아티아어: Ferdinand I. 페르디난드 1세)에 해당한다.

카를 5세의 동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인 부르군트 공작인 미남공 필리프와 후아나 여왕의 차남이다. 1526년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으로 뽑혔고, 오스만 터키와 여러 번 싸웠으며,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크리스트 교도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그는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조이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 성립에도 노력하였다.

후안 폰세 데 레온

후안 폰세 데 레온(스페인어: Juan Ponce de León, 1474년 ~ 1521년 7월),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콩키스타도르이다. 금을 위하여 유럽인의 원정을 이끈 그는 결국 현재 미국의 남동부 해안으로 들어와 플로리다라는 이름을 지으고 푸에르토리코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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