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니아 반란

이오니아 반란아이올리스, 도리스, 퀴프로스, 카리아가 관련된 반란이자 더불어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여러 지방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기원전 499년에서 기원전 493년까지 이어졌다. 이 반란의 중심에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를 위해 임명한 참주들에 대해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의 불만과 더불어 2명의 밀레투스 참주였던 히스티아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의 개인적인 행동이 원인이었다. 기원전 540년경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이오니아 주변의 도시 국가들이 정복되었고, 그 이후 사르디스에 있는 페르시아 사트라프가 임명한 토착민 참주들이 통치를 하게 되었다. 기원전 499년, 당시의 밀레투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페르시아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를 정복하기 위한 연합 원정을 떠났다. 이 임무는 대실패로 끝났고, 참주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이오니아 전 지역을 선동하는 길을 택했다.

기원전 498년, 아테나이에레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이오니아 도시 국가들은 사르디스로 진격하여 도시를 함락하고 불태웠다. 그러나 이오니아로 귀환하는 길에 페르시아 부대들의 추격을 받았고, 〈에페소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원정이 이오니아 인들의 유일한 공세였고, 추후는 방어로 일관된 페르시아의 침공이 이어졌다. 기원전 497년 페르시아 군대는 반란 외부 지역을 탈환하는 것으로 목적으로 세 방면으로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응전을 했다. 그러나 반란이 카리아까지 확산되는 것은 다우리세스 휘하의 최대 규모 군대가 그쪽으로 재배치 되는 것을 의미했다. 카리아의 원정이 처음에느 성공적이었지만, 페다소스 전투에서의 매복으로 전멸당했다. 이것으로 전황은 기원전 496년과 495년의 나머지 동안에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군과 해군이 재집결해서, 밀레투스에 반란군 외국 지역으로 진격했다. 이오니아는 해로로 밀레투스를 방어할 수 있기를 모색했지만, 살라미스의 변절로 라데 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후 밀레투스는 포위를 당해 함락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페르시아로 끌려갔다. 이 두번의 패전으로 반란은 효율적으로 진압되었고, 카리아는 결과적으로 페르시아에 항복을 했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493년을 서해안을 따라서 반란 도시들을 줄여가는데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것은 양측이 공평하게 여겨지는 이오니아에 대한 평화 정착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오니아 반란은 그리스페르시아 제국의 최초의 주요한 충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최초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비록 페르시아가 소아시아를 재확보할 수 있었지만, 다리우스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레트리아를 징벌할 결심을 했다. 게다가 수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의 존재가 제국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고,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다리우스는 그리스 전체를 정복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기원전 492년에, 페르시아의 제1차 그리스 침공(차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이오니아 반란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오니아 반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일부
Map Anatolia ancient regions-en

소아시아 내의 이오니아의 위치
날짜기원전 499년~493년
장소
결과 페르시아 제국의 승리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와 퀴프로스를 다시 회복함.
교전국
이오니아, 아이올리스,
도리스, 카리아
아테나이, 에레트리아,
키프로스
페르시아
지휘관
아리스타고라스,
카로피노스,
헤르모판토스,
에우알키데스†,
멜란티오스
포카이아의 디오뉘시오스
히스티아이오스
메가바테스,
아르타페르네스,
다우리세스†,
휘아메에스,
오타네스,
다티스
Ionian Revolt Campaign Map

이오니아 반란

배경

미케네 문명의 붕괴에 따른 암흑의 시대그리스의 많은 중요 인물들이 소아시아로 이주해서 그곳에 정착했다. 이러한 정착민들은 주로 아이올리스 인, 도리아 인, 이오니아 인으로 구성된 세 개의 집단이었다.[1] 이오니아 인들은 리디아카리아의 해안 지역을 따라서 정착하면서, 이오니아를 구성하는 12개의 도시를 세웠다.[1] 이러한 도시들 중에는 밀레투스, 미우스, 카리아프리에네, 에페소스, 콜로폰, 레베도스, 테오스, 클라조메나이, 포카이아 그리고 리디아의 에리트라이가 있었다. 그리고 사모스 제도와 키오스 제도도 그러한 것들이었다.[2] 비록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서로 독립적이지만, 그들은 공유된 유산을 인식했고, 공동의 사원과 만남의 장소인 파니오니온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화적 연맹체’를 형성했고, 그것에 다른 도시와 심지어는 다른 이오니아 종족이 끼어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3][4]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기원전 560년경 유명한 리디아 왕인 크로이소스 왕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 독립적으로 남아있었다.[5] 이오니아 도시들은 그후 리디아의 통치 하에 있다가 아케메네스 제국키루스 대제에 의해 리디아가 정복될 때까지 그러한 상태를 유지했다.[6]

반란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페르시아 제국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다스리고자 각각 임명한 참주들에 대해 소아시아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밀레토스의 두 참주 히스티아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도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540년경에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였으며, 그리하여 사르데이스의 페르시아 태수가 임명한 토착 참주가 도시를 다스리게 되었다. 기원전 499년에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아르타페르네스 태수와 함께 낙소스 섬을 정복하려고 원정대를 보내었다. 원정대는 패주하였고, 자신이 실각할 것을 직감한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에 대항하여 이오니아 전체가 봉기할 것을 선동하게 되었다.

반란

낙소스 침공

기원전 499년, 다리우스 1세의 사촌 메가바테스가 이끄는 페르시아의 삼단노선 200척이 낙소스에 파견되었다. 당초 이 함대는 헬레스폰투스로 향하는 항로를 선택하여 낙소스의 눈을 속이려 했지만, 아리스타고라스와 메가바테스의 불화로 목적이 드러났기 때문에 낙소스에 본토 방비를 유예할 시간을 주었다. 낙소스는 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과 산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그들이 그리스 본토에서 상인들의 배로 보급을 받으면서, 4개월을 농성하면서 버티자, 페르시아군은 군자금 부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밀레토스는 함대 파견에도 거액의 전비를 부담했지만, 낙소스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자금 회수도 어려워졌다. 지위 유지에 불안을 느낀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에 대해서 반란을 꾀했다. 그는 이오니아에 있는 주요 도시 국가의 참주를 잡아서 추방하고 민주정을 시행하며,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에게 원군을 요구했다.

당시 아테나이는 스파르타, 에기나, 보이오티아 , 테바이와 적대하는 사면 초가의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아테나이의 정치 지도자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지만, 독립을 주장했던 아테나이 민회는 페르시아에게 굴종하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아르타페르네스에 의해 아테네가 참주 체제를 타도할 때 추방한 히피아스의 참주 복귀 발령이 나자, 아테네 민회는 아리스타고라스의 요구에 따라 밀레토스 지원을 결정했다.

사르디스 침공

기원전 498년 봄, 에레트리아에서 동반한 5척과 아테나이 군이 탄 20척의 삼단노선이오니아로 항해를 시작했다.[7] 그들은 에베소 근처에서 이오니아 주력군과 합류했다.[8] 혼자서 군을 이끌기를 거부하고, 아리스타고라스는 그의 형제인 카로피노스와 또 다른 밀레투스 인인 헤르모판토스를 장군으로 임명했다.[9]

이 군은 당시 에베소 인들의 안내를 받아 산맥을 지나 아르타페르네스의 사트라프의 주도인 사르디스로 인도되었다.[7] 그리스는 페르시아인들 모르게 접근했고, 아랫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타페르네스는 여전히 주력군을 이끌고 성을 지켰다.[8] 그때 도시 하부에 화재가 발생했고, 헤로도토스는 우발적으로 그 화재를 확산시킬 것을 제안한다. 성 안에서 성을 지키고 있던 페르시아인들은 불타는 도시에 둘러싸였고, 사르디스 시장에 등장하여 그리스인들과 싸웠다. 그리스인들은 사기가 떨어져 도시에서 퇴각하여 에베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10]

헤로도토스다리우스 대제가 사르디스의 화재 소식을 듣고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누구인지 물어 본 후에) 보복할 것을 맹세하며, 하인에게 매일 세 번씩 자신의 맹세를 상기시키라고 명령했다. “주인님, 아테네놈들을 기억하십시오.”

에페소스 전투

소아시아에 있던 페르시아 군은 사르디스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결해서 아르타페르네스가 있는 곳으로 진격했다.[11] 그들이 사르디스에 도착했을 때, 그리스군은 막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에베소 방향으로 추격을 시작했다.[11] 그들이 그리스군을 따라 잡은 것은 에베소 외곽이었는데, 그리스군은 방향을 돌려 싸울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11] 홀랜드는 페르시아 군이 주로 기병이었으며, 그래서 그리스군을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7] 그 시기의 전형적인 페르시아 기병은 투창기병이었을 것이며, 연발적인 투창으로 정지해 있는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보편적인 전술이었다.[12]

사기가 떨어지고, 피곤한 그리스 병력이 페르시아 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음은 자명하며, 에베소에서 잇달은 전투에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7] 많은 그리스군이 전사를 했는데, 그 중에는 에레트리아의 에우알키데스 장군도 있었다.[11] 그 전투에서 탈주한 이오니아 인들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으며, 반면 남아있던 아테네인과 에레트리아인은 배를 돌려받고, 가까스로 그리스로 귀환할 수 있었다.[7][11]

에페소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이 전투는 이오니아의 공격에 대한 반격일 뿐이었으며, 그 뒤 이오니아는 수세를 취한다. 기원전 497년 페르시아인들은 반란 지역의 주변 땅을 수복하고자 세 번에 걸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반란은 카리아까지 번져 반란군의 규모는 커졌으며 다우리세스의 지휘로 이곳으로 군대를 움직였다. 처음에 반란군은 카리아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페다소스 전투에서 복병을 만나 궤멸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496년495년에는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라데 해전

기원전 494년에 페르시아 군대와 해군이 다시 집결하여 반란의 진원지인 밀레토스를 향해 곧바로 진격하였다. 이오니아 함대는 바다에서 밀레토스를 지키려 하였으나 사모스 사람들이 이탈하면서 〈라데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그리하여 밀레토스는 포위되어 함락되고, 이 곳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 두 번의 패배로 반란은 사실상 끝났으며, 카리아도 페르시아에 항복하였다. 페르시아는 양 측이 대개 공평하다고 여긴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기원전 493년에 아직 자신들에 대항하던 서쪽 해안의 도시들을 점차 굴복시켰다.

결과와 영향

이오니아 반란은 그리스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분쟁이었으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첫 단계로 서술된다. 소아시아를 다시 복속하긴 하였으나, 다리우스는 반란을 도운 아테나이에레트리아를 토벌하기로 맹세하였다. 게다가 그리스의 무수한 도시국가들이 계속 제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는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이오니아 반란의 다음 단계로 기원전 492년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관련항목

각주

  1. 헤로도투스 I, 142–151
  2. 헤로도투스 I, 142
  3. 헤로도투스 I, 143
  4. 헤로도투스 I, 148
  5. 헤로도투스 I, 26
  6. 헤로도투스 I, 141
  7. Holland, pp. 160–162.
  8. Herodotus V, 100
  9. Herodotus V, 99
  10. 헤로도토스 V, 101
  11. Herodotus V, 102
  12. Lazenby, p. 232.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또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칭하기도 한다.)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합과 페르시아 제국이 격돌한 전쟁을 말하며, 기원전 499년에 일어나 450년까지 이어졌다. 소규모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 세계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충돌한 것은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 대왕이 이오니아를 정복하면서 일어났다. 이오니아의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페르시아는 각 나라에 참주를 보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모두에게 문제거리가 되어버렸다.

기원전 499년 당시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낙소스 섬을 정복하고자 원정대를 보내었다. 그러나 원정대는 패주하였고, 아리스타고라스는 생각을 바꾸어 (별 어려움 없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소아시아의 헬라스 지역 전체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493년까지 이어졌는데, 점점 소아시아의 더 많은 지역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고 기원전 498년에 이들 군대의 도움으로 페르시아의 지역 도읍인 사르데이스를 점령하여 불태웠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이런 일을 한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에 복수하기로 맹세하였다. 반란은 계속되어 기원전 497년~495년 사이에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기원전 494년에 페르시아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반란의 중심지인 밀레토스를 공격하였다. 라데 해전에서 이오니아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반란군은 몰락하였고, 이듬해에 마지막 저항도 진압되었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제국 땅에서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고 본토 그리스인이 개입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그리스를 달래고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를 주벌할 계획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492년에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그리스를 침공하였는데,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오스는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를 복속하였으나 여러 불상사로 조기에 작전을 끝내야하였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두 번째 군대가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 하에 그리스로 출정하였는데, 이번에는 에게 해를 건넜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퀴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하고 에레트리아를 포위한 끝에 함락하여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길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나이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아서 페르시아의 노력은 당분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기원전 486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리스 정복의 과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는 몸소 원정길에 나서 터무니없이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페르시아는 유명한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주도한) 그리스 연합군을 무찔러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연합군 함대를 파괴하려다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듬해 헬라스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고 그리스 침략을 막아내었다.

헬라스 사람들은 여세를 몰아 소스테스(기원전 479년)과 뷔잔티온(기원전 478년)의 페르시아 주둔군을 몰아내고 미칼레 전투에서 남은 페르시아 함대를 격침하였다. 뷔잔티온 공성전에서 파우사니아스 장군의 행동으로 여러 그리스 국가가 스파르타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反페르시아 연합은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으로 재조직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이후 30년간 페르시아에 대항한 전쟁을 계속하여 유럽에 남은 페르시아 주둔군을 몰아냈다. 기원전 466년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델로스 동맹은 두 번의 승리를 거두어 결국 이오니아 도시들의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기원전 460년~454년)을 지원하려고 델로스 동맹이 개입하다가 크게 패하고 원정을 중단하였다. 기원전 451년에는 퀴프로스에 함대가 파견되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조용하게 끝나버렸다. 어떤 사료에서는 전쟁 상태가 종료된 것이 아테나이와 페르시아간의 소위 〈칼리아스 조약〉이라는 평화 협정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오늘날 이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료의 대부분은 그리스 역사가들(특히 헤로도토스)과 일부 로마 역사가들의 사료이다.

라데

라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라데 보그다노비치: 과거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라데 셰르베지야: 크로아티아의 배우

라데 해전

라데 해전(Battle of Lade, 고대 그리스어: Ναυμαχία τῆς Λάδης, Naumachia tēs Ladēs)은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 반란 기간 일어난 해전이다. 레스보스 주도에 의한 이오니아 도시 연맹과 다리우스 대제의 페르시아 제국 간에 벌어진 해전으로 페르시아 제국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반란을 모두 종식시킬 수 있었다.

이오니아 반란은 페르시아 제국이 임명한 참주들에 대한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촉발되었다. 기원전 499년, 당시 밀레투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를 정복하기 위한 연합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자신의 지위가 위험해진 것을 감지한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 전체 도시를 선동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제에게 반란을 획책할 것을 선택했다. 기원전 498년, 처음에는 이오니아 세력들이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공세를 이어갔다. 그리하여 사르디스를 점령했지만,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배를 당함으로써 기세가 꺾였다. 그후 반란은 카리아와 키프로스로 확산되었다. 페르시아도 3년에 걸친 소아시아 원정을 이어갔지만, 결정적이고, 효과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군과 해군은 재집결하여, 밀레투스 반란군 외곽지역으로 진군해 갔다.

이오니아 인들은 밀레투스의 방어를 밀레투스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해로로 밀레투스를 방어하길 모색했다. 이오니아 함대는 밀레투스 해안에서 떨어진 라데 섬에 집결하였다. 페르시아는 라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일부 이오니아 인들을 설득하여 세력 이탈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페르시아 군이 이오니아 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살라미스 함대가 페르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와 이오니아 함대가 마침내 조우를 하게 되었을 때, 살라미스 함대는 전장을 이탈했고, 이것은 이오니아 전선의 붕괴를 가져왔다. 비록 히오스와 몇몇 함선들이 남아서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지만, 해전은 결국 페르시아의 승리로 돌아갔다.

라데 해전의 패전으로, 이오니아 반란은 거의 끝이 났다. 이듬해 페르시아는 반란군 잔당의 근거지를 소탕했고, 이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오니아 반란은 고개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주요한 충돌이었고, 그리하여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초전의 양상을 나타냈다. 비록 소아시아가 페르시아 쪽으로 다시 넘어 왔지만, 다리우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반드시 징벌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게 했다. 게다가 그리스 많은 도시 국가들을 제국의 안정에 지속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리스 전체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의 제1차 그리스 침공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차기 양상이 되었으며, 이것은 이오니아 반란의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마르도니오스

마르도니오스(그리스어: Μαρδόνιος, ? ~ 기원전 479년)는 기원전 5세기 초에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제국 군 사령관이었다.

마르도니오스는 페르시아 귀족 고브리야스의 아들이었다. 고브리야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자 다리우스 1세가 왕이 되는 것을 도왔다. 다리우스는 고브리야스의 딸과 결혼하였고 고브리야스는 다리우스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마르도니오스는 다리우스 1세의 딸 아토로스트라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다리우스는 마르도니오스를 그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오니아 반란 이후 기원전 492년 그를 보내 아테네를 이오니아를 도운 것에 대해 처벌하였다. 아테나이로 가는 중에 그는 이오니아 도시에서 페르시아 독재자를 폐위하는데 군대를 사용하였고 민주 정부를 세웠다. 그것은 당시 그리스를 놀라게 한 조치였다. 사학자들은 이 조치가 페르시아 군이 통과한 후에 반란을 방지하려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함대와 군대는 그 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통과하였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공격의 첫 희생은 타소스였다. 그곳은 그리스 섬으로 많은 광산이 있었다. 그곳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소속이 되었다. 해군과 군대는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진군하였는데 그곳은 곧 페르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이들 승리 후에 마르도니오스의 함대는 아토스 산 근처의 해안에서 폭풍에서 파괴되었고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는 300척의 배와 병력 2만을 잃었다. 이후 마르도니오스는 트라키아의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하였다. 마르도니오스가 전투에서 부상당하였지만 그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함대의 손실은 소아시아로의 후퇴를 의미하였다.

그는 다리우스에 의해 면직되었는데 그는 다티스와 아타퍼네스를 기원전 490년에 그리스 침공군을 이끌도록 임명하였다. 그들은 낙소스를 함락시키고 에레트리아를 파괴하였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마르도니오스는 다리우스의 후계자이며 그의 조카이자 사촌인 크세르크세스 1세의 호의로 복직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에는 그리스와 다시 전쟁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마르도니오스가 반복적으로 그에게 다리우스의 패배를 보복하여야 한다고 확신시켰다.

이 관점은 크세르크세스의 조언자 아르타바누스에의해 반대되었고 그는 문제에 더욱 주의할 것을 강요하였다. 헤로도토스는 마르도니오스를 악당 조언자로 그렸는데 그가 단지 그리스의 사트라프(태수)가 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 참여히였고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페르시아의 패배한 이후 크세르크세스를 다른 전투에 지속하기를 권하였다. 이번에는 마르도니오스는 크세르크세스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가 떠날 때 그는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된 그리스 일부지방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당시 알렉산드로스 1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병합하였지만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마르도니오스의 계획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아테나이에 넘겼다. 그리스인으로서 그는 그리스가 노예화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후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나이를 약탈하였고 아테나이는 살라미스 해전 이전에 버려졌다.

그는 아테나이에 돌아올 것을 제안하였고 아테나이를 재건하는 것을 돕기로 하였지만 아테나이인들은 다른 전투를 준비하였다.

마르도니오스는 다른 페르시아 장군의 만류에도 전투 준비를 하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오스는 압도적이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해 전사했다.

메가바테스

메가바테스(고대 그리스어: Μεγαβάτης, 라틴어: Megabates 생몰년 불명)는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장군이다.

밀티아데스

밀티아데스(고대 그리스어: Μιλτιάδης, Miltiades, 기원전 550년경 - 기원전 489년)는 고대 아테네의 군인이다. 올림픽 전차 경주로 유명한 키몬의 아들이다. 헬레스폰투스 케르소네소스의 참주였지만, 이오니아 반란 이후 아테네로 돌아와 장군이 되었고,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 플라타이아이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군을 이겼다.

아르타페르네스

아르타페르네스(고대 그리스어: Ἀρταφέρνης)는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의 형제로 사르디스의 사트라프이자 페르시아 장군이다.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제1차 그리스 침공(First Persian invasion of Greece)은 기원전 492년에 시작되었고,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두 차례 뚜렷한 회전이 있었던 내습은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와 같은 도시 국가를 징벌하기 위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친정을 하였다. 이 도시들은 페르시아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이오니아 반란 도시들을 지원하여 다리우스의 분노를 샀던 것이었다. 다리우스 또한 유럽으로 제국을 확장하고 서부 변경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오스가 주도한 최초의 원정으로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6세기 후반에 마케도니아를 종속시킨 후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르도니우스 함대가 아토스 산 해안 근처에서 난파를 당해 더 이상의 원정은 중단되었다. 이듬해, 의도를 증명한 다리오스는 그리스 전역에 특사를 파견하여 굴종을 요구했다. 특사를 참수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그의 협박을 수용했다. 아테네는 여전히 도전적이었으며, 스파르타는 이제 사실상 그와의 전쟁에 임했다. 다리우스는 다음 해 추가 원정을 하겠다고 명령했다.

기원전 490년에 있었던 두 번째 페르시아 원정은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 하에 있었다. 원정군은 처음에는 낙소스 섬을 함락시키고 불태웠다. 그리고 나서 키클라데스 제도의 다른 섬들을 차례로 페르시아 제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에레트리아에 상륙을 했는데 잠시 포위를 한 후 함락시켰다. 에레트리아는 파괴되었고, 시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원정군이 아테네로 향하는 도중에 아티카를 경유하기 위해 마라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소규모 아테네 군대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

이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원정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원정군은 아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정군은 낙소스와 에레트리아를 징벌한다는 대부분을 목적을 달성하였고, 마케도니아 전역을 포함한 에게 해 대부분의 지역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 원정에서 미완으로 남은 과업은 다리우스로 하여금 그리스의 완전정복과 아테네, 스파르타의 징벌을 위한 훨씬 더 큰 규모의 그리스 침공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제국 내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이 원정은 지연되었고, 다리우스는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480년에 시작되는 제2차 페르시아 침공은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몫이 되었다.

키티온

키티온(고대 그리스어: Κίτιον, 라틴어: Citium)은 한때 키프로스 남쪽에 있었던 소왕국으로 현재 키프로스 라르나카 부근에 존재했다. 기원전 13세기경에 형성되었고, 아크로폴리스도 만들어져 있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

플라타이아이 전투(Battle of Plataea)는 페르시아 제국 크세르크세스 1세의 원정 후 기원전 479년 8월 페르시아 잔존 세력과 페르시아 측에 붙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 대항하여 스파르타, 코린트, 아테네 등 그리스 연합군이 싸워서 이들을 격퇴한 전투이다. 우익에 붙은 스파르타 군만으로 대부분의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으며, 그것이 직접적인 승리의 요인으로 이어졌다.

히스티아이오스

히스티아이오스(Histiaeus ? - 기원전 494년)는 뤼사고라스의 아들로 기원전 6세기 후반 밀레토스의 참주이다.

이오니아 반란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제3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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