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전

유격전(遊擊戰, 영어: Guerilla warfare)은 파르티잔 또는 비정규군에 의한 변칙적인 전투를 말한다.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은 1808년 나폴레옹페르난도 7세(1784-1833, 에스파냐왕) 유폐에 반대한 에스파냐인 토비(土匪)의 소전투에서 유래한다. 1936년에스파냐 내란 이후 전 세계에 퍼져서 현대에는 국민의 무장 투쟁의 전술 혹은 전투 형태의 한 가지를 의미하는 데 쓰인다.

개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의 에스파냐 침공시 프랑스군을 괴롭힌 에스파냐 민중의 저항·투쟁이 최초의 현대적 형태의 게릴라전쟁인데, 게릴라 전쟁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으로 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부터이다.

중국·북베트남 정권 성립의 특징은, 민중으로 조직되어 성장한 게릴라세력인 비정규적인 군사력으로의 시도에 성공했다는 점에 있다. 이런 게릴라 전력이 성장하여 정규군이 되고, 기존 전문 군대에 도전하였다는 것은 현대의 전쟁과 군사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게릴라전쟁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게릴라가 싸우는 전투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느 정도 본격화되고 근대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전술적으로는 그러한 형태로 전투를 하고 있다. 게릴라전쟁의 요체는 이른바 '히트 앤드 런'의 기습전술 전개에 있으며, 적군의 완전한 포위격멸이나 거점점령 등을 주작전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위 '해방지구'로 정한 지역에 대해서는 모든 게릴라 전술과 수단을 동원하여 적군에 대항하고 격퇴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게릴라전쟁은 토착민중의 지원을 받아 수행하는 전쟁이므로 게릴라와 지역주민 사이에는 연대감이 확립되어 민·군(民軍)이 일체가 된다. 재래식 전쟁은 군사력의 균형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단기간에 종결된다. 그러나 게릴라전으로 개시하는 전쟁은 보통 장기화된다. 게릴라전쟁의 특징은 전선이나 점령지가 명확하지 않은 점에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전장이 형성된다. 또한 게릴라는 공군병력이 전혀 없으나, 적군의 공군기지에 잠입하거나 기습공격을 하여 지상의 항공기를 파괴하는, 지상의 공중전이라는 대항전술로 상대의 압도적인 공군전력에 도전하기도 한다.

병기

게릴라는 그 특성상 거의 경화기로 무장하고, 일부 로켓포·무반동총·박격포 등의 중화기를 휴대·사용한다. 그러나 게릴라 봉기의 초·중기단계에 있어서는 토벌군측의 무기를 약탈하는 데 전념하여, 그것으로 무장을 강화해 간다. 그리고 탄약도 적으로부터 탈취해야 하기 때문에 '탄약고는 적부대에 있다' 라는 슬로건이 생겨났다.

일반적인 정규군이 보유하는 중포(重砲) 등은 작전상 사용이 불가능하나, 게릴라 병력으로 운반할 수 있는 로켓포 등으로 포격전을 벌일 수 있다. 게릴라병기로서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유인(誘引)무기 또는 덫식 무기라고 부르는 수제무기로 낙하식·덫식·함정식이 있고, 또 유인폭약 등이 있다.

근대적인 군사력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점점 완전한 대량 파괴 살상무기를 보유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시대에 수제(手製)의 병기가 전장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현대전을 새로운 각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같이 보기

국공 내전

국공 내전(중국어 정체자: 國共内戰, 간체자: 国共内战, 병음: guógòng nèizhàn 궈궁 네이잔[*], 영어: Chinese Civil War)은 1927년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중국 재건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1927년에서 1936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옮긴 1949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구분한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은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하였다. 이후에도 1958년 진먼 포격전까지 하이난 섬 등 중국 대륙 부속 도서에서 양측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양안(兩岸) 사이에 정전(停戰)에 관한 공식 합의는 없었으나, 1979년 1월 1일 미·중 국교 정상화로 중국인민해방군이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을 멈춘 이후 사실상 정전 중이다.

네스토르 마흐노

네스토르 이바노비치 마흐노(우크라이나어: Нестор Іванович Махно, 1888년 10월 26일 ~ 1934년 7월 24일)는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혁명가이다.

대분란전

대분란전(對紛亂戰, counter-insurgency)은 유격대, 테러리스트 등의 분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 및 행동이다. 대테러 작전, 대유격대 작전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다. 국방부에서는 대반란전이라고 부른다. 영어 약자로는 COIN 임무라고 부른다.

분란세력은 지역의 정치적 장악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 세력이 약소할 경우 정규군 등에 대하여 유격전 등의 전법을 취한다. 또한 민중의 지지가 있는 경우에는 공격과 보급 등에 민중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 때문에 대분란전에서는 군경 뿐 아니라 민간과의 협력작업이 요구되며, 비군사적 수단도 사용된다. 적의 후방지원을 파괴하기 위해 민생지원과 경제정책을 통해 분란세력이 유지될 수 없는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고, 분란세력과 민중을 유리시키는 동시에 대테러, 대유격 등의 군사행동을 실시한다.

대홍수 (역사)

대홍수(大洪水, 폴란드어: Potop)란 말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17세기 중반 일련의 전역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 1648년 흐멜니츠키 봉기(Khmelnytsky (Chmielnicki) Uprising)부터 1667년 안드루소보 휴전(Truce of Andrusovo)까지 연방을 무대로 러시아-폴란드와 제2차 북방 전쟁을 포함한다. 엄밀한 의미로 이 말은 제2차 북방 전쟁(1655년-1660년);다만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스웨덴 대홍수(Swedish Deluge; 리투아니아어: Švedų tvanas, 폴란드어: Potop Szwedzki)라고 알려져 있는 스웨덴의 침입과 연방의 영토 점령을 가리킨다. 전쟁 기간 동안 연방은 강대국의 지위와 어림잡아 인구의 ⅓에 해당하는 인구를 잃었다.

매복

매복(埋伏, Ambush)은 전통적인 군사 전술 중 하나로, 전투원들이 언덕이나 하층 식생 등에 은폐한 뒤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순간적으로 공격하는 전술이다. 매복은 역사적으로 계속 사용된 전술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민병

민병(民兵, Militia)이란 사회나 국가가 위험에 처했을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싸우는 것을 말한다. 의용군(義勇軍, volunteer army), 의병(義兵)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등 역사상 많은 전쟁들에서 민병의 활약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다.

헤이그 협약과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민간인이라 해도 무기를 공공연히 휴대하고 전쟁법을 준수하며 지휘체계와 휘장 등을 갖춘 민병을 조직할 경우 합법적인 교전권자로 인정되며, 전쟁포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반도 전쟁

반도 전쟁(영어: Peninsular War,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Guerra peninsular)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각 참전국에 따라서 스페인 독립 전쟁(스페인어: 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ñola, 프랑스어: Guerre d'indépendance espagnole), 프랑스 침공(포르투갈어: Invasões francesas), 프랑스 전쟁(스페인어: Guerra del Francés)이라고 부른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대륙제패체제에 가입시켰고, 1808년에는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위에 즉위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두 나라의 민족적인 격렬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스페인의 게릴라활동을 촉발시켰다. 이 게릴라들은 적극적인 활동으로 전성기에 있던 나폴레옹의 군대를 교란하고, 해방 전쟁의 발단을 열었으며, 이것은 곧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1812년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 스페인의 연합군은 살라망카에서 승리를 거두어 마드리드를 점령한 다음, 프랑스인을 축출하였다.

발트 3국 유격전

발트 3국 유격전은 소비에트 연방이 1940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발트 3국을 지배하자 이에 맞서 발트 3국 국민들이 일으킨 무장 투쟁 운동이다. 1944년 소비에트 연방의 발트 3국 점령 이후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에스토니아에서 10,000명이 라트비아에서 10,000명이 그리고 리투아니아에서 30,000명이 게릴라전에 참여했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소련군이 게릴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1956년 이후 발트 3국의 게릴라 전쟁은 종료되었지만 이들의 수치는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베트남 민족주의 전선과 그 성격이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oviet–Afghan War)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9년 이상 지속된 전쟁이다. "무자히딘"이라 불리는 반군세력이 기독교 및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의 괴뢰정권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과 소련군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9년 이상 지속된 전쟁 동안 최소 8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망해 난민이 되었다.

1978년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친소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전통 무슬림들의 반동을 정부는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소련이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정치범 수천 명이 체포되고 2만 7천여 명이 처형당했다. 1979년 4월,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친소정권은 일부 도시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요청을 받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군사고문 정도만 파병하려 했으나, 1979년 12월 24일 제40군을 배치하면서 전면 침공에 들어갔다. 수도 카불에 도착한 소련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하피줄라 아민을 죽이고(폭풍333호 작전) 바브락 카르말을 후임 대통령으로 세웠다.1980년 1월, 이슬람 협력 기구 가맹 34개국의 외무부처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UN 총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104대 18의 표결로 통과시켰다.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은 인접한 파키스탄과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막대한 양의 물자와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고, 미국과 페르시아 만의 아랍 군주국들이 자금을 지원했다.무자히딘들은 소규모 세포단위의 유격전을 펼쳤고, 소련군은 도시지역과 주요 도로들만 장악했을 뿐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80%를 차지하는 향촌지역은 소련군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소련은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고 반군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시골 마을들을 밀어버리며 관개시설을 파괴하고 수백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는 등 가혹행위를 자행했고 그 결과 반군과 민간인을 막론하고 수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사살당했다.1980년대 중반이 되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소련군은 108,800 명으로 늘어났으며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새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갔다.

이 전쟁은 대개 냉전의 일부분으로 취급되며, 장기간 지속된 비대칭 전쟁이고 침공한 강대국이 결국 패퇴했다는 점에서 서방세계에서는 “소련판 베트남 전쟁” 또는 “곰 덫”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곰을 잡은 덫이라는 별명대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의 붕괴에도 크게 기여한 변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몬 볼리바르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란코(스페인어: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1830년 12월 17일)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리베르타도레스, Libertadores)로 불린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독립 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은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 정부에 대항해 1918년에 만들어진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으로, 영국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전쟁(The Anglo-Irish War)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1919년 1월 21일부터 2년반 동안 계속되었고, 1921년 7월 11일 휴전하였다. 이 전쟁으로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가 각각 분리되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옛 IRA'로 불러, 후에 같은 이름으로 출현한 급진주의 IRA와 구별하고 있다.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프랑스어: Guerre d'Algérie, 아랍어: ثورة جزائرية)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와 알제리 독립 운동 세력이 벌인 독립 전쟁으로, 결국 알제리는 프랑스에서 독립을 얻었다.

이 전쟁은 탈식민지화에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게릴라전, 마키, 민간인에 대한 테러, 양측의 고문 자행, 프랑스 군대의 대테러 작전 등 복잡한 성격을 보인 전쟁이었다. 전쟁은 6명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구성원들이 1954년 11월 1일에 "붉은 제성인의 날"(Toussaint Rouge)에 일으켰으며, 프랑스 제4공화국의 기반에 타격을 주어 정권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은 다자적인 복잡한 분쟁으로, 여러 세력들이 서로 대립하였다. 독립 세력 편의 민족해방전선은 알제리 민족 운동(MNA)과 적대하며 싸웠으며, 프랑스 본토에서는 카페 전쟁으로 싸웠다. 또 프랑스 편에서는 우익 비밀 군사 조직(OAS)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더불어 프랑스 정부와 투쟁하였다.

기 몰레(국제 노동자 프랑스 지부, SFIO)의 지도로 프랑스 군대는 당시 프랑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화평"을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공공 질서 작전"은 이내 대규모 전쟁으로 커졌다. 알제리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개 평화적인 해결을 지지하였으나, 점차 독립을 추구하는 쪽으로 돌아섰으며, 이는 여타 아랍 국가와 세계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는 사이 프랑스는 "프랑스령 알제리"(l'Algérie Française) 문제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한쪽에서는 현 상태를 유지하여, 완전히 프랑스 공화국에 통합하는 방법과 독립하는 방법 사이에서 중간 상태로 협상하자고 주장한 반면, 다른 편에서는 완전한 독립을 허용하자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결국 군사적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으나, 상황이 변하여 알제리의 독립이라는 대세는 더이상 꺾을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의회의 불안정 때문에 프랑스 제4공화국은 1958년 5월 위기로 샤를 드골이 돌아오면서 붕괴되고 드골이 프랑스 제5공화국으로 집권하여 자신과 드골주의자들이 만든 새 헌법을 확립하였다. 드골이 권좌에 오르면서, 프랑스의 식민지를 모은 프랑스 연합을 대체한 프랑스 공동체에 알제리가 계속 통합될 것이었다.

그러나 드골은 알제리의 독립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는지 이를 인정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드골은 알제리 사람들에게 투표를 실시하였다. 알제리 사람들은 알제리가 독립하고 프랑스가 민족해방전선과 협상하는 쪽을 선택하였고, 그리하여 1962년 3월 에비앙 합의가 이루어져 알제리가 독립하였다.

미셸 드브레 정부의 협상에 반대하던 장군들이 1961년 4월 알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던 비밀군사조직은 에비앙 합의가 실행되고 피에 누아(Pied noir: 유럽 혈통의 알제리 사람)가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평화적인 시위와 파업과 더불어 폭격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전 1956년에 다른 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던 아흐메드 벤 벨라가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알제리 전쟁은 대반란 작전을 고안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전략적 틀을 제시하였으며, 프랑스 군대가 자행한 고문은 이러한 방법의 합법성과 효과를 놓고 도덕적ㆍ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양측에서 고문을 행하면서, 이 논쟁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알제리 전쟁은 현대 알제리 역사의 시작점이었다. 프랑스와 알제리 사회 모두 전쟁으로 오랫동안 상처를 남겼다. 1997년 프랑스 의회 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하자 1999년 6월, 전쟁이 끝난지 37년 만에 프랑스 의회는 이것이 "전쟁"이었음을 인정하였으며, 1961년 파리 학살은 2001년 10월에서야 프랑스 정부가 인정하였다.

그러나 민족해방전선이 저지른 1962년 오랑 학살을 알제리 정부는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는 여전히 이 전쟁의 영향을 받고 있다. 탈식민지 사상의 저서로 유명한 프란츠 파농(Frantz Omar Fanon)은 알제리 전쟁 초기에 블리다에 있는 자신의 병원을 도피 중인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은신처로 제공했으며, 이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외교를 담당하게 된다.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조나스 사빔비

조나스 말레이루 사빔비(포르투갈어: Jonas Malheiro Savimbi, 1934년 8월 3일 ~ 2002년 2월 22일)는 앙골라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철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나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해외유학을 위해 장학금을 받았다.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고 스위스 로잔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에 앙골라의 독립지도자 올덴 호베르투가 주도하는 앙골라 인민연합(UPA)에 가입했다. 당시 이 단체는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와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사빔비는 올덴 호베르투와 결별하고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동맹(UNITA)을 결성해 포르투갈에 대항해 싸웠다.

UNITA는 남부 앙골라에 기반을 두고 MPLA과 앙골라 내전을 벌였는데 UNITA는 중화인민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 등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1992년 정부와 평화 협정을 맺고 총선에 참여했으나 패배하자 다시 무력 저항을 시작했고 1994년 UN이 중재한 평화 협정에 다시 서명해 부통령 자리가 제안되었으나 계속 고원에서 무력 투쟁을 벌였다.

2002년 2월 22일 결국 목시코 지방에서 남아프리카 특수부대와 이스라엘 용병, 앙골라 정부군들과 교전을 벌이다 머리, 다리, 목, 상체에 15발에 달하는 기관총 사격을 받고 전사했다. 사후 UNITA는 구심점을 잃고 안토니오 뎀보 를 후계자로 세웠으나 그도 전사했으며 뒤를 이은 파울로 루캄바도 항복을 선언해 8월 1일 반군 5만 명을 해체했다.

체 게바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스페인어: Ernesto "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목요일)~1967년 10월 9일(월요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대학교수, 외교관,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다.

파르티잔

파르티잔(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한 빨치산이라는 단어로도 부른다. 제복이나 계급장 등도 없기 때문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파르티잔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침략군 내지 정복군, 점령군, 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내전이나 기타 국가 내부의 분쟁에서도 볼 수 있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파리 해방

파리 해방(프랑스어: Libération de Paris)은 1944년 8월 19일부터 8월 25일까지 지속된 전투이다.

페루 분쟁

페루 분쟁(스페인어: Conflicto en el Perú)은 1980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페루 정부와 반군 사이의 분쟁이다. 현재 페루 공산당의 무장조직인 인민유격대(Ejército Guerrillero Popular)가 정부군과 항쟁하고 있으며, 1982년에서 1997년까지는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도 싸움에 가담했었다. 1980년 이래로 페루 분쟁으로 70,000 명의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분쟁으로 인해 발생한 희생자의 절대 다수는 민간인이다. 분쟁에 참여중인 모든 세력은 민간인 살해에 책임이 있다. 페루 분쟁은 콜롬비아 분쟁, 과테말라 내전에 이어 세 번째로 긴 라틴아메리카 분쟁이다.

후안 도밍고 페론

후안 도밍고 페론(스페인어: Juan Domingo Perón, 1895년 10월 8일 ~ 1974년 7월 1일)은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43년의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여 군사정부의 내각에 입각, 노동부장관을 지냈다. 1944년 ~ 1946년 부통령, 1946년 ~ 1955년, 1973년 ~ 1974년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에비타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에바 페론이다. 후안 페론은 정치적으로 페론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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