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파

아리우스파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가 주장한 기독교 신학이다. 아리우스는 ‘성자’ 예수는 창조된 존재(피조물)이며,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는 성격의 주장을 했는데, 삼위일체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신학적 흐름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배격되었으며, 아리우스 일파에 대한 공식적인 파문선언이 삽입된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였다.

가이세리크

가이세리크(Gaiseric, 389년 ~ 477년)는 반달족의 왕이며 군데리크의 동생이다. 겐세리크(Genseric) 또는 게이세리크(Geiseric)라고도 불렸다.

고트 문자

고트 문자는 4세기에 아리우스파(Arius)의 주교인 울필라스가 고트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 낸 문자 체계이다.

이 문자 체계는 로마자의 한 형태인 '고딕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트 문자는 모두 27개의 자모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19개 또는 20개는 그리스 문자의 언셜(uncial) 서체에서 나온 것이고, 5개 또는 6개는 라틴 문자를 약간 변형한 것이며, 나머지 2개는 고대 북유럽의 룬 문자의 서체에서 빌려 왔거나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문자 체계는 대체로 라틴 문자나 그리스 문자와 일치하지만 음가와 글자 순서는 약간 다르다.

울필라스는 이 고트 문자로 4세기에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고트어 성서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5세기와 6세기에 씌어진 여러 문헌에 그 편린이 재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색 양피지에 금과 은으로 쓴 아르겐테우스 필사본이다. 고트어로 쓴 이 문헌은 고트 문자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완전히 소멸한 고트어의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고트어

고트어(*gutiska razda, *𐌲𐌿𐍄𐌹𐍃𐌺𐌰 𐍂𐌰𐌶𐌳𐌰, * )는 현재는 사멸된 동게르만어군 가운데 한 언어이다. 표기 문자는 고트 문자를 사용하였다.

고트어로 표기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 서고트족의 아리우스파(Arius)의 주교인 울필라스가 그리스어를 고트어로 번역한 성서의 일부이다. 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고트 문자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울필라스가 고트 문자를 고안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문헌은 형태론적으로 게르만어파 중 가장 오래된 자료가 담겨 있으며, 게르만 조어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보존되었기 때문에, 언어사적과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교황 리베리오

교황 리베리오(라틴어: Liberius, 이탈리아어: Liberio)는 제36대 교황(재위: 352년 5월 17일 - 366년 9월 24일)이다. 《리베리오 교황표》에 의하면, 5월 22일 교황 율리오 1세의 뒤를 이어 로마 주교좌에 착좌했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는 성인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스 황제가 350년에 서거하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을 반대한 아리우스파 주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방의 주교들로 하여금 그 공의회의 ‘동일한 실체’를 철회하고 그 신조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를 배척하였다.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리베리오가 로마 주교좌에 오르자마자 전임 교황 율리오 1세가 지지한 아타나시오의 주장과 사르디카 교회회의의 결정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리베리오는 아타나시오에게 로마에 오도록 지시하였지만, 아타나시오는 자기가 가는 대신 이집트의 주교 80명이 서명한 문서를 보냈다. 그 문헌을 심사한 로마 시노드는 아타나시오의 적들을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리베리오는 당시 아를에 있는 숙소에 머물러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에게 아타나시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아퀼레이아에 교회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리베리오가 보낸 사절인 카푸아의 빈첸시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정통 주교를 배척하고 아를에서 교회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황제의 주장에 동조할 것을 강요받아야 했다.이에 리베리오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결국 리베리오가 요청한 교회회의는 밀라노에서 개최되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압력이 작용하여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주교들은 모두 아타나시오를 이단자로 판정하였다. 리베리오도 아타나시오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하지 않자 355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보낸 병사들에 의해 한밤중에 라테라노 궁전에서 체포되어 이틀 후 트라키아로 유배되었다. 2년 간의 유배생활 끝에 그는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문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리베리오의 굴복’이라고 부른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다시 리베리오를 로마로 불러들였지만, 로마 교회는 이미 대립교황 펠릭스 2세가 차지한 지 1년이 지난 후였다. 리베리오와 대립교황 펠릭스 2세가 공동으로 기독교를 사목하게 하는 것이 황제의 의도였지만, 막상 리베리오가 로마에 당도하자 로마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대립교황 펠릭스 2세를 로마에서 쫓아냈다. 리베리오와 대립교황 펠릭스 2세 중 누구도 리미니 교회회의(359년)에 참석하지 않았다.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사망하자, 리베리오는 과거 아타나시오 등의 주교들을 단죄하였던 교회회의의 법령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고 그들을 주교직에 다시 복직시켰다. 366년 리베리오는 자신을 찾아온 동방 교회의 사절단을 냉대하였으며, 옛 아리우스주의자들 중에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지녔던 이들은 로마 주교좌와의 일치를 강조하며 보다 잘 대접해 주었다. 리베리오는 동방 교회의 사절단에게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니케아 신경만이 참된 기독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리미니 교회회의의 결정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교황 리베리오는 366년 9월 24일 선종하였다.

교황 요한 1세

교황 요한 1세(라틴어: Ioannes PP. 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I, 470년 ~ 526년)는 제53대 교황(재위: 523년 8월 13일 ~ 526년 5월 18일)이다. 이탈리아 시에나 태생으로,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5월 18일이다.

부제 시절 대립교황 라우렌시오의 지지자였으나,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쳐 교황 심마코에게 잘못을 구해 용서를 받았다. 499년부터 502년까지 열린 로마 시노드 기록에 ‘부제 요한’이라는 서명이 있는데, 아마도 요한 1세의 서명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교회에는 오직 일곱 명의 부제만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요한 1세로 확신되기 때문이다. 또한 6세기 철학자 보에티우스 자신의 논문에서 당시 그를 ‘부제 요한’으로 언급하였다.교황으로 선출되어 요한 1세로 즉위할 당시 그의 건강은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테오도릭 대왕의 요청에 따라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누스 1세 황제와 면담을 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 당시 유스티누스 1세는 정통 신앙을 따른 황제로서 523년 아리우스주의에 속한 모든 성당을 폐쇄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강력한 칙령을 내렸는데, 그 여파가 오늘날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동고트 왕국에도 미치게 되었다. 아리우스파였던 테오도릭 대왕은 위기에 직면했음을 직감하고 요한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칙령의 강도를 완화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정통 기독교나 아리우스주의를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종래의 관용 정책을 없애고 복수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요한 1세는 많은 측근을 대동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였다. 성직자 수행원으로는 라벤나의 주교 에우세비오, 파눔 포르튀네의 주교 에우세비오, 캄파냐의 주교 사비노 등이 있었으며, 평신도 수행원으로는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테오도루스, 인포르투누스, 아가피투스 그리고 귀족 아가피투스가 있었다.5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요한 1세와 그의 사절단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시민들은 열다섯 번째 이정표까지 나와서 초와 십자가를 들고 요한 1세를 열렬히 환영하였고 황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여 대접하였다. 요한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성당에서 황제와 제국 신료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포함한 동방 교회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수 성탄 대축일과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성대하게 집전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는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강제로 개종시킨 아리우스파 교회들을 다시 본래의 아리우스주의로 복귀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요한 1세의 모든 요청을 다 들어주었다. 요한 1세가 5개월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체류를 끝내고 돌아오자, 테오도릭 대왕은 그를 자신이 거주하는 라벤나로 불러들였다. 왜냐하면 테오도릭 대왕은 요한 1세가 유스티누스 황제와 공모하여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의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요한 1세는 수행원들과 함께 테오도릭의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감옥에서의 냉대와 관리 소홀로 갑자기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교황 연대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요한 1세는 비아 아르데아티나에 있는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형제와 프리실라에 있는 성 펠릭스와 성 아다욱토 순교자들의 무덤을 정비했다고 한다.

교황 율리오 1세

교황 율리오 1세 또는 율리우스 1세 (라틴어: Iulius I, 이탈리아어: Giulio I)는 제35대 교황(재위: 337년 2월 6일 - 352년 4월 12일)이다. 사후 기독교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4월 12일이다.

율리오는 ‘감았다’란 뜻이다. 《교황 연대표》에 의하면, 루스티쿠스의 아들로서 로마 태생이다. 교황 마르코가 선종한 지 4개월 만에 새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율리오 1세는 주로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맞서 정통 기독교의 교리를 수호한 활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삼등분되었다. 두 아들 중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는 정통 그리스도인이었고 동로마를 차지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 추종자들과 가까이 지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주교를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추종자들은 341년 안티오키아 시노드에서 아타나시오 주교를 다시 추방하는 동시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와 교황 율리오 1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아타나시오의 주교직 퇴위를 갱신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가려는 피스투스를 새 주교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타나시오는 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가한 일에 대하여 변명하고 그 결과를 율리오 1세와 다른 주교들에게 발송하였다. 율리오 1세는 아타나시오에게 우호적인 의견을 표명한 후에 중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해 양측 모두를 초대하였다. 하지만 율리오 1세의 제안에 대해 동방의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물리적으로 아타나시오를 쫓아낸 후 피스투스 대신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새 주교로 착좌시켰다.

또 다시 쫓겨난 아타나시오는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며, 342년 율리오 1세가 주재한 시노드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의 적법한 주교로 재차 인정받았다. 더불어 그와 함께 추방된 다른 주교들도 모두 복직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보았다. 율리오 1세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강조한 내용을 담은 서신들을 동방 주교들에게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설사 아타나시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먼저 로마 주교인 자신에게 이를 알리고 자문을 구했어야 했음과 자신이 소집한 시노드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모르는 채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율리오 1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는 곧 우리가 제일 먼저 따라야 할 관례이며, 이를 통해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모른 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무지하지 않게 되는 방법을 모르는 채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율리오 1세의 서신들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 콘스탄티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직 박탈이 재차 확인되었으며, 이단자 아리우스의 주장들이 채택되었다. 그 후 율리오 1세는 난국을 타결하기 위해 일리아에 아르키다무스와 필록세누스를 사절로 파견하여 사르디카 교회회의를 소집하였지만, 동방 주교들은 겨우 76명만 참석하였다. 다른 동방 주교들은 서둘러 필립폴리스에 모여 필립폴리스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그들은 아타나시오와 다른 주교들을 단죄하여 그들의 주교직 박탈을 재차 확인하였으며, 또한 율리오 1세에게 로마 주교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의하였다. 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은 교황 사절들과 접촉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으며, 남아있던 300명의 주교들은 이전 로마 시노드의 결의를 재차 확인하고 율리오 1세와 아타나시오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로마에 상소할 여러 규정을 결정하였다. 아타나시오는 346년 그레고리우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의 허락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율리오 1세는 352년 4월 12일 선종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리베리오가 착좌하였다. 율리오 1세는 훗날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한편 율리오 1세는 350년부터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때부터 기독교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생긴 셈이다. 본래 12월 25일은 고대 로마인들이 숭배하던 태양신 미트라를 기념하는 명절이었지만, 그리스도야말로 참 태양이라는 의미에서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하여 태양신 숭배를 쇠퇴시키고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확실하게 안착하였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린 날을 3월 25일로 지정했고, 완벽한 그리스도의 삶은 꽉 찬 기간 동안이었으므로 수태도 3월 25일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되어 9개월 동안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라는 계산도 나왔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약 329년 ~ 390년 1월 25일)는 카파도키아지방의 나지안조스의 기독교 주교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379-381)로서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 인물이며 삼위일체설을 확립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삼위일체 신학에 관하여 이런 말을 했다. " 하나를 생각하는 즉시로 셋의 광채로 둘러싸이며, 셋을 분별하자마자 즉각적으로 하나로 되돌아 간다."

니케아 신경

니케아 신경(-信經, 라틴어: Symbolum Nicaenum)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기독교회가 채택한 신앙 고백문이다. 현대 기독교회에서 니케아 신조는 1차 니케아 공의회 신경이 아니라 개정본 니케아 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주로 의미한다.

랑고바르드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568년~774년) 또는 롬바르드 왕국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한 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이 도나우강에 정착한 이후 알보인왕의 명령 아래 동로마 제국령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북이탈리아를 빼앗고 세운 왕국이다. 774년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존속하였으며, 수도는 파비아였다.

발렌스

발렌스(라틴어: IMPERATOR CAESAR FLAVIVS IVLIVS VALENS AVGVSTVS; 328년 – 378년 8월 9일)는 로마 황제(재위기간 : 364년-378년)이다. 형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로마 제국의 동부의 통치권을 넘겨받았기 때문에 발렌스는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볼 수 도 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쇠퇴를 시작하는 분수령이 된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패하고 죽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2세 (Flavius Valentinianus, 371년 - 392년)은 375년부터 392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유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375년 11월 22일, 아버지가 죽은 지 5일 뒤, 4세의 나이로 아퀸쿰(지금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판노니아의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동부는 그의 삼촌 발렌스가 황제였고 제국 서부는 배다른 형인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이미 있었지만 두 사람은 모두 발렌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승인하였고 어머니의 후견하에 이탈리아·아프리카·일리리쿰을 관할로 통치하도록 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어머니의 섭정을 받으며 있었는데 어머니 유스티나는 시칠리아 태생으로 아리우스주의 광신도였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타니아에서 제위를 찬탈하여 그라티아누스를 죽이고 황제로 인정되었고 급기야 387년 이탈리아를 침략해 왔다. 발렌티니아누스와 그의 어머니는 밀라노를 떠나 제국 동부의 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테살로니카로 도망갔다. 388년 테오도시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는 막시무스에 대한 원정을 떠나 결국 막시무스를 제거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밀리노로 돌아와 복위했다. 391년 초,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발렌티니아누스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갈리아를 지배했던 아르보가스트에게서 다시 권력을 받으려고 비엔나로 갔다. 그러나 프랑크족인 아르보가스트는 노골적으로 이 젊은 황제를 무시하고 권력이양을 거부했다.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어 전쟁으로 비화하려는 찰나,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는 비엔나의 궁정에서 21살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암살의 증거가 전혀 없어 자살로 여겨졌으나 아마도 아르보가스트에 의해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암브로시우스가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자살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리우스

아리우스(Arius, 250년 또는 256년 - 336년)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활동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지만 성부와 유사한 본질(유사본질), 곧 신성을 가진 존재로써 하느님으로 불릴 수 있지만 '참 하느님'은 오직 성부이시며,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인간도 하느님(참 하느님)도 아닌 인간과 하느님(성부)의 중간 존재라고 하였으며(천사라는 것도 아님)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였고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초기 기독교 분파로 발전하였다. 당시 그의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폭넓게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주재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경(영어: 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표시가능함을 증명하고, 뉴턴은 그것을 증명했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아탈라리쿠스

아탈라릭(Athalaric, 516년 ~ 534년 10월 2일, 재위 526년 ~ 534년)은 테오도릭 대왕의 손자이며 동고트 왕국의 2대 왕이다.

526년 테오도릭 대왕의 죽음 이후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인 어머니 아말라순타에게 넘겨졌다. 아말라순타는 아탈라릭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키고자 했으나 고트족의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고트식으로 키워지길 원했다. 결국 폭음과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건강을 망쳐 534년 10월 2일 죽었다.

알라리쿠스 1세

알라리크 1세(Alaric I, 370년~410년, 재위 395년~410년)는 초대 서고트 왕으로, 다뉴브 강 하류 지방의 출신이다.

394년에 로마의 보조군이었던 일족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와 동맹 관계에 있었으나 이듬해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죽고서 아버지에게서 동로마의 지배권을 물려받은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서고트족에게 급료 지불을 정지하자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왕으로 추대하고 서방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396년, 서고트족은 그리스를 지키는 테르모필레의 험로인 코린트 지협을 저항없이 통과하여 코린트·아르고스·스파르타 등의 도시를 공략해 아테네에서는 막대한 배상금을 얻어냈다. 이에 서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재상 스틸리코는 바다로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해 서고트족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지만, 스틸리코가 조금 방심한 틈을 타 서고트족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고 동로마 제국이 스틸리코가 동로마 영토를 침범했다고 항의해 스틸리코는 어쩔수 없이 퇴각했다. 그 후 서고트족은 에피루스(지금의 알바니아)와 일리리쿰(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서 헝가리에 걸치는 지역. 아드리아 해 동안)까지 진출했다.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일리리쿰의 총독직을 주어 회유하려 했지만, 알라리크가 노린 것은 동로마가 아니라 서로마, 그 중심이자 가장 물자가 풍부했던 이탈리아를 목표한 일변, 북쪽으로 도나우 강 유역에 나와 게르만 부족 몇 개를 흡수하고서 400년 이후 서로마에 자주 침입하였다.

당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밀라노에 있던 궁을 버리고 라벤나의 행궁에 틀어박혀 있었고 라에티아(지금의 스위스 일대)에서 아레만니 족과 전쟁 중이던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의 침공 소식을 듣고 다급히 그들을 항복하게 하고서 이탈리아로 향했다. 403년 보르렌티아의 전투에서 서고트군은 스틸리코의 군대에 패했다. 알라리크는 그 와중에 로마에 대한 급습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하고서 도망했다.

패주하고서 일리리쿰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했다. 그 뒤 스틸리코와의 교섭 끝에 서로마의 우군으로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서로마로부터 정착할 땅을 받는다는 약조에 동의했지만, 408년에 황제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고 합의는 일방으로 파기되었다. 알라리크는 이탈리아에 재침입했지만, 황제가 있던 라벤나는 치지 않은 대신 로마로 진격해 시를 겹겹이 에워싸고 로마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해 로마는 식량난에 고통을 겪었다. 평화를 교섭코자 찾아온 원로원 의원 바실리우스와 수석 서기관 요하네스 앞에서 알라리크는 로마 성벽에서 물러나는 대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로마 안에 있는 모든 금과 은, 모든 값지고 귀중한 동산, 그리고 야만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모든 노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원들이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남겨주시렵니까?"라고 호소하자, 알라리크는 조소하듯이 "목숨은 남겨주지!"라고 대답한다. 얼마 뒤 금 5천 파운드와 은 3만 파운드, 비단옷 4천 벌, 주홍색 옷감 3천 필, 후추 3천 파운드를 받고 알라리크는 로마의 포위 해제에 동의하고서 진군한 투스카니에 겨울 막사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알라리크의 휘하로 야만족 노예 4만여 명이 모여들었고 처남 아타울푸스가 고트족과 훈족에서 온 증원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변에서 테베레 강변까지 로마군을 뚫고 왔다. 알라리크는 원로원 의원 세 명을 자신의 사절로 라벤나에 다시 보내 인질 교환과 조약 체결을 건의했는데 종전대로 알라리크의 서로마 군대 총사령관 지위 유지와 로마에서 해마다 곡물과 현금을 보조금으로 지급, 그리고 이탈리아와 도나우 강 사이에 있던 다르마티아와 노리쿰, 베네치아의 속주를 자신에게 할양이 그의 요구 사항이었다. 로마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노리쿰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의향도 비추었다. 그러나 황제의 신하 올림피우스는 거꾸로 알라리크를 치려고 그에게 보내는 사절에 수반해 탈마티아인 병사 6천 명을 로마로 보냈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눈에 띄는 모습으로 행군하던 그들은 고트족 병사들의 포위 공격으로 궤멸되었다. 알라리크는 이에 분개하지도 않고 화평 제안을 다시 내놓았다.

원로원의 무례하고 경솔한 서간, 그리고 황제와 그 측근 신하들에 의한 거듭되는 배신에 알라리크는 마침내 분노했고 410년에 서고트군은 사상 최초로, 이 '영원한 도시' 로마를 함락하게 하고 사흘 간에 걸쳐 약탈했다.(게르만 족장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이어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곡창(穀倉)인 아프리카로 남진하던 중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코센차에서 수난(水難)으로 졸사(猝死)하였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주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알라리크의 유해는 콘센티아 성벽 아래로 흐르는 부센티누스 강의 물길을 잠시 바꾼 다음 드러난 마른 강바닥 위에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고 알라리크의 부하들은 장례하느라 잠시 바꾸어놓았던 물길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공사에 동원된 모든 포로를 살해했다고 한다. 무덤의 위치를 영원히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오도아케르

오도아케르(영어: Flavius Odoacer, 433년 ~ 493년 3월 15일) 혹은 오도바카르(Odovacar), 게르만식으로 아우다바크르(Audawakr)는 초대 이탈리아왕(재위 480-493)이다.

훈족과 스키리아인의 피가 반씩 섞인 헤룰리족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쫓아내고 서로마를 멸망시켰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나폴리 만의 루쿨라눔(Lucullanum)에 유배되었으며, 그의 최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511년까지는 살아남았다. 한편 그의 전임이였던 율리우스 네포스는 스스로 다시 로마 황제를 자처함으로써 갈리아 지역 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로물루스를 떨어트린 뒤 오도아케르는 이전의 리키메르(Ricimer) 등이 했던 것과 달리 또다른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지 않고 동로마 제국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동로마 제국을 받들어 스스로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썼다.

그러나 오도아케르와 동로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아, 489년 동로마의 제논 황제는 동고트족의 테오도릭 대왕에게 군권을 위임, 오도아케르를 정벌하게 했으며 결국 라벤나가 함락되면서 493년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릭의 손에 살해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영어: First Council of Nicaea, 라틴어: Concilium Nicaenum Primum)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Nicaea,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 황제의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의 공의회이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이 논의되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의 정치적 외연이 확대되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의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콘스탄티우스 2세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Iulius Constantius, (317년 8월 7일 - 361년 11월 3일)는 337년부터 361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 왕조. 처음에는 형인 콘스탄티누스 2세(340년 죽음) 및 동생 콘스탄스(350년 죽음)와 공동 황제로 제국을 삼분(三分)해 통치했으나 353~361년에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테오도리쿠스 마그누스

테오도리쿠스 대왕(Theodoric the Great, 454년 ~ 526년 8월 30일, 재위 488년 ~ 526년)은 동고트 왕국의 초대 국왕이며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이탈리아의 군주였다. 고트어 이름은 티우다레익스(고트어: 𐌸𐌹𐌿𐌳𐌰𐍂𐌴𐌹𐌺𐍃)로 "백성들의 왕" 이라는 의미이다.

게르만 제민족의 분화
언어
선사시대
로마 철기 시대
민족 대이동
사회문화
종교
복식
전쟁
장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공식 단죄한 신념들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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