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인

브리튼인(Britons)은 브리튼 제도에 살던 켈트족으로, 초기 중세시대까지 살았던 민족이다. 5세기 이후에 그들은 프랑스브르타뉴 지역까지 이주했으며, 픽트족과도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서기 43년에 로마 제국브리타니아를 정복하여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었으나, 5세기경에는 앵글로색슨족이 침입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웨일스콘월 지역에 유입되었다.

Map Gaels Brythons Picts GB
고대 브리튼 섬의 켈트족 분파. 적색이 브리튼인, 청색이 픽트인, 녹색이 게일인.
고도딘

고도딘(웨일스어: Gododdin [ɡɔˈdɔðin], 고대 웨일스어: Guotodin)은 후로마 브리튼의 헨 오글레드 지방에 있었던 브리튼인 계통의 국가다. 고도딘인들은 보타디니인의 후예였다.

고도딘 왕국의 강역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동남부의 로디언과 스코티시보더스에 해당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서쪽으로는 마찬가지로 브리튼인 국가인 어스트라드클리드와, 북쪽으로는 빅트인들과 국경을 맞댔다. 클라크매넌셔 부근에 살던 이들은 특별히 마나우 고도딘이라고 알려졌다. 오늘날의 웨일스 북부에 위치한 귀네드 왕국의 건국자 쿠네다는 마나우 고도딘의 군벌로서 5세기에 남하한 것으로 추측된다.6세기, 고도딘 남쪽의 브러네이흐가 앵글인의 침공을 받았고, 앵글인은 거기에 베오르니체 왕국을 세웠다. 앵글인들은 그 뒤로도 계속 북진했고, 견디다 못한 고도딘은 600년경 장병 300명을 일으켜 앵글인의 요새 카트라에스(오늘날의 노스요크셔주 캐터릭으로 추정)를 공격했다(카트라에스 전투). 이 전투에서 고도딘을 비롯한 브리튼인 연합군은 파멸적 패배를 당했는데, 그것을 추모한 시가 웨일스어 문학에서 중요한 작품인 「어 고도딘」이다.

638년, 에이던(Eidyn, 오늘날의 에딘버러)이 앵글인들에게 함락되었고, 고도딘은 베오르니체의 속국이 되었다. 고도딘인들이 언제쯤 앵글인들에게 흡수동화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베오르니체는 데렌리체와 합방하여 노섬브리아 왕국을 형성하고, 노섬브리아는 통일 잉글랜드 왕국에 복속된다. 1018년 알바 왕국의 말 콜룸 2세가 트위드강까지 남하하여 그 이북을 스코트인의 강역으로 삼으면서 고도딘의 옛 땅은 스코틀랜드에 속하게 되었다.

러데르흐 1세 하엘

러데르흐 1세 하엘(웨일스어: Rhydderch I Hael: fl. 580년-614년경)는 헨 오글레드 지역의 브리튼인 왕국 알트클리트의 왕이었다. 헨 오글레드에서 가장 유명한 왕들 중 하나로, 후대의 웨일스어 및 라틴어 중세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할리 족보서 및 아돔나누스 히엔시스의 콜룸바 성인전에 따르면, 러데르흐 1세는 알트클리트 왕 투드왈의 아들로, 부왕을 계승해서 즉위했다. 9세기의 「니니안 주교의 기적」, 「성자 니니안의 삶」에 "투두아엘(라틴어: Tuduael)", "투드왈두스(라틴어: Tudwaldus)"라는 이름의 폭군이 나오는데, 러데르흐 1세의 부왕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러데르흐 1세의 족보는 그 조상이 더픈왈 1세 헨이라고 한다. 이런 족보들을 제외하면 러데르흐의 친족관계에 관해서는 웨일스어 문헌들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대개 프러데인섬의 삼제시 같은 영웅시가에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 친족 중에 세널트 하엘(Senyllt Hael)이라는 이는 「어 고도딘」에서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것으로 이름났다고 한다. 세널트의 아들 누드 하엘(Nudd Hael)은 "프러데인 섬의 3대 관대한 남자" 삼제시에 러데르흐와 함께 등장한다.

12세기 웨일스의 법전서 『와운의 흑색서』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러데르흐가 북방의 다른 군주들과 함께 남쪽의 귀네드로 원정을 갔다는 이야기다. 또다른 북방 군주 엘디르 무인파우르(Elidir Mwynfawr)는 귀네드 아르본 칸트레브에서 죽임을 당했고, 러데르흐가 에이던의 왕 클러드노, 상술한 누드 하엘, 그리고 달리 알려진 정보가 없는 모르다브 하엘(Mordaf Hael) 등과 합류하여 귀네드 왕 룬 히르 압 마엘군에게 복수하러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들 북방군은 바다를 통해 쳐들어가 아르본을 약탈했으나 룬 히르의 군대에 격퇴되었다. 룬 히르는 러데르흐를 역공하여 포스강까지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 내용이 워낙 불확실하여 이 아르본 원정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내용은 실제로 6세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기보다, 룬 히르의 후손인 웨일스 왕들이 룬 히르의 위대함을 윤색하기 위해 그전부터 이미 웨일스 전통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러데르흐 1세를 그 적수로 갖다붙여 지어낸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웨일스 전통사에서 러데르흐 1세는 베오르니체의 앵글로색슨인들과 초기 항쟁을 벌인 북부 브리튼인 왕들 중 하나로 기록한다. 『브리튼인의 역사』 제63장에서 러데르흐 1세가 6세기 말의 여러 베오르니체 왕들의 적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어느 전역에서 그들과 맞섰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레게드 왕 우리엔, 및 다른 브리튼계 왕 모르칸트 불크와 동맹하여 베오르니체 왕 테오도리쿠스와 싸웠는데, 우리엔이 린디스판 섬을 삼일 밤낮 봉쇄하면서 승세를 잡은 적도 있었으나, 우리엔의 군재를 시기한 모르칸트가 그를 암살하면서 내분이 일어나 망했다.

러데르흐 1세가 참전한 주요 전쟁으로는 베오르니체의 앵글로색슨인과의 항쟁 외에도, 게일인 왕국 달 리어타의 아단 막 가브란이 알트클리트에 쳐들어와 맞서 싸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단은 알트클리트의 수도에 쳐들어와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짐승 한 마리 살려두지 않고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콜룸바 히엔시스가 기록해 놓았다. 콜룸바의 기록을 제외하면 이 브리튼인과 게일인 사이의 전쟁에 관해서 기록한 문헌은 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트클리트와 달리어타는 후로마 시대 이레 중세 초기까지 이웃나라로서 여러 차례 싸우지 않았다고 볼 증거도 없어 보인다. 달 리어타는 당대 브리튼 정치의 상대적 뉴커머였지만, 그 일대 지역에 살던 스코트인들은 보르티게르누스 시대부터 하드리아누스 방벽 주위의 브리튼인 왕국들에 쳐들어오곤 했다. 또한 아단 막 가브란은 픽트랜드에서 노섬브리아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확대하고 다닌 공격적인 군주였다.

이런 웨일스어 문헌들을 제외하면, 러데르흐 1세에 관한 주요 정보원으로는 라틴어로 쓰인 기독교 성인전들이 있다. 특히 글래스고의 수호성인인 성 뭉고는 6세기 사람응로 러데르흐 1세 및 아단 막 가브란과 동시대인이었다. 12세기에 이오켈리누스 데 푸르네스가 쓴 뭉고 성인전은 그 내용 전반이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뭉고에게 우호적인 후원자로 "레데레크(Rederech)"라는 왕이 나온다. 레데레크 왕은 뭉고에게 글래스고의 땅을 주어 어스트라드클리드 일대의 주교좌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왕의 왕좌부는 파르틱에 있었다고 한다.러데르흐 1세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뭉고 성인전에서는 뭉고와 같은 해(614년)에 죽었다고 하고, 웨일스 편년사서들에서는 612년에 죽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614년으로 조정했다. 610년대에 죽었다면 이것은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러데르흐 1세가 콜룸바 히엔시스(597년 몰)와 동시대인이라고 한 것과 부합한다. 아돔나누스는 러데르흐 1세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액면 그대로 믿을만 한 것 같다.

러데르흐 1세는 더르누인(웨일스어: Dyrnwyn)이라는 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검은 프러데인섬의 13대 비보 중 하나라고 한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이 검을 뽑으면 검날이 불타오르는 마검인데, 러데르흐 1세는 이 검을 누구에게든 건네주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관대왕"이라는 뜻의 "하엘"(웨일스어: Hael, 영어: the Generous)을 별명으로 얻게 되었다. 하지만 왕이 관대하게 검을 건네주어도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건드리지 못했다.

말 콜룸 막 돔날

말 콜룸 막 돔날(중세 아일랜드어: Máel Coluim mac Domnaill: ?-997년)은 10세기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이다. 더픈왈 압 오와인의 아들로서, 어스트라드클리드를 다스려온 컴브리아 왕조에 속한다. 이름이 웨일스어가 아닌 게일어임은 그가 브리튼인 출신 왕실과 주변의 스코트인 귀족들의 관계가 양호했을 때 태어났음을 시사한다. 945년 앵글인의 왕 에드먼드 1세가 어스트라드클리드를 침공해왔다. 에드먼드 1세는 스코트인들에게 컴브리아인들을 지배할 권한을 인정하는 한편, 브리튼인 왕실의 씨를 끊기 위해 말 콜룸의 형제들의 눈을 뽑았다.

언제 더픈왈의 치세가 끝나고 그 아들 말 콜룸에게 왕위가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971년 스코트인의 왕 킬렌 막 일둘브가 러데르흐 압 더픈왈이라는 자에게 죽었는데, 이 암살범이 더픈왈 왕의 아들, 즉 말 콜룸의 형제라는 설이 있다. 일단 973년 이후로는 말 콜룸이 양위를 받거나 공동왕이 되었는 것 보이는데, 부왕과 함께 앵글인의 왕 에드거 평화왕이 주최한 회의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회의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아마 앵글인의 강역과 스코트인의 강역, 컴브리아인의 강역들 사이의 국경을 조정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더블린과 군도에 거점을 박은 바이킹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회의였을 수 있다.

더픈왈은 975년 로마 순례길에 죽었다. 하지만 상술했듯 말 콜룸이 언제 왕위를 승계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부왕이 죽기 전에 양위받았을 수도 있고, 973년 회의 이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간에 말 콜룸의 치세는 별 일이 없었다. 말 콜룸은 997년 죽고 동생 오와인 압 더픈왈이 계승했다. 그 다음 왕인 오와인 포엘이 말 콜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바돈산 전투

바돈산 전투(라틴어: Bellum in monte Badonis, 웨일스어: Cad Mynydd Baddon)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인 사이에 벌어졌다고 생각되는 전투다. 브리튼인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앵글로색슨계 왕국들의 팽창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아서왕이 참전한 전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아서왕이 바돈산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은 9세기 《브리튼인의 역사》에 처음 나타난다. 문헌상 남은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날짜, 전투 위치, 그리고 전투 과정의 상세까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부디카

부디카(Boudicca)는 그레이트브리튼 섬을 정복한 로마 제국의 점령군에게 대항하였던 이케니족의 여왕이다.

부디카의 남편인 프라스타구스는 이케니족의 왕으로 로마 제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임종 직전에 그는 자신이 죽으면 왕국을 그의 딸들과 로마 제국 황제에게 분배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하지만, 정작 그가 죽자 그의 유언은 무시되었다. 브라스타구스의 왕국은 사실상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왕비 부디카는 채찍질을 당하였다. 또한, 그의 딸들은 강간을 당하였다.

서기 60년 또는 61년에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북웨일스의 앵글시 섬에서 전투를 치루게 되었는데, 부티카는 이케니족과 트리노반테스족과 기타 부족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과거 트리노반테스족의 수도였던 카물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을 점령하여 파괴하였다. 카물로두눔을 탈환하기 위해 나선 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 제9군단이 나섰지만, 격파되었다.

부디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수에토니우스는 반란군의 다음 목표인 20년 역사의 상업 도시인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을 향해 서둘러 갔다. 그러나 론디니움을 방어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수에토니우스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도시 전체를 불태워 없앴다. 베룰라미움(오늘날의 세인트올번스) 역시 버림받고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70,000명에서 80,000명으로 추정되는 인명이 함께 몰살당하였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극도로 열세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웨스트미들랜즈에서 병력을 재집결시켜 와틀링스트리트 전투에서 부디카가 이끈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당시 로마 황제였던 네로는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자 모든 병력을 그레이트브리튼 섬에서 철수하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나중에 가서 수에토니우스가 이끈 군대가 부디카의 군대를 상대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로마의 지배권은 다시 회복되었다. 부디카의 죽음에 대해서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는데,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로마군에게 생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또 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잉글랜드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에서 부디카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이 다시금 활기를 띠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제2의 부디카로 추앙받으면서 곧 부디카는 영국인의 영웅으로 전설적인 명성을 갖게 되었다. 이후 부디카는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인물로 남아 있다.

브르타뉴반도

브르타뉴반도(프랑스어: Bretagne)는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반도이다. 대서양을 향해 크게 튀어나온 모습을 하고 있다. 북쪽은 영국 해협, 남쪽으로는 비스케이만을 접하고 있다.

브르타뉴는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켈트어파 계열의 독자적인 언어인 브르타뉴어를 사용한다. 근세 이전까지 단일한 구역으로 묶여 있었던 브르타뉴 지역은 오늘날 피니스테르주, 코트다르모르주, 일에빌렌주, 모르비앙주의 넥갱의르트망으로 나뉘어 있다.

브리튼 제도의 역사

브리튼 제도의 역사(History of the British Isles)는 브리튼 제도 지역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개념이다. 브리튼 제도는 선사 시대 이래 인간의 활동이 이어져 왔으며 많은 민족과 국가가 관여 되어 있다. 여기에는 브리튼 섬을 기반으로한 스코틀랜드, 웨일스, 잉글랜드와 같은 국가의 역사와 독립이전의 아일랜드의 역사 뿐만 아니라 브리튼 제도의 역사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로마 제국, 스칸디나비아, 덴마크, 베네룩스 3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여러 나라들의 역사도 함께 다루어진다.

오늘날 브리튼 제도는 두 개의 국가(영국, 아일랜드)와 세 개의 왕실령(건지 섬, 맨섬, 저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은 다시 4개의 홈 네이션스(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홈 네이션스느 독자적인 국가에서 출발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다만,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 독립 이후에 아일랜드에서 분리되었다.

브리튼인의 역사

《브리튼인의 역사》(라틴어: Historia Brittonum)는 브리튼 섬의 원주민(켈트족 브리튼인)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주장되는 문헌으로, 대략 828년경 전후로 작성되어 11세기 이후의 필사본들로 보존되었다.

대개 9세기 사람 넨니우스가 그 저자라고 하며, 몇몇 판본들은 넨니우스의 이름으로 된 서문이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넨니우스의 서문은 후대에 가필된 위조이며 문헌 본문은 익명의 여러 사람들의 글이 모인 집합체라고 본다.《브리튼인의 역사》는 트로이아 난민 아이네아스의 후손 브루투스의 이름을 따서 브리튼 섬의 이름이 붙은 것이며, 브루투스가 브리튼 섬에 정착하여 브리튼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견지에서 쓰여졌다. 12세기에 몬머스의 제프리가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썼을 때 이 책을 매우 많이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도 많은 후대 문헌들에 영향을 미쳐 전근대 브리튼 전통 역사학에 브리튼인의 트로이아 기원설을 뿌리내리게 만들었다.

아서 왕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문헌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아서가 왕이 아니라 "군사 지도자(dux bellorum)라고 한다. 아서가 참여해 싸웠다는 12차례의 전투들이 열거되지만 《캄브리아 편년사》와 달리 그 전투들이 일어난 시기는 비정되지 않고 있다.

브리튼인의 왕

브리튼인의 왕(라틴어: Rex Britannorum 렉스 브리타노룸[*], 영어: King of the Britons 킹 오브 더 브리튼스[*])이란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정복을 전후한 시기부터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시대에 이르기까지 켈트족 브리튼인 통치자들 중 가장 강대한 이들에게 붙은 칭호였다. 그들이 살았던 당대에 그렇게 칭해지는 경우도 있었고, 후세에 소급적으로 지칭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브리튼인이란 현대 영국인과는 다른 민족이며, 그 혈통은 현대에는 웨일스, 콘월, 브르타뉴에 이어지고 있다.아서 왕 같은, 신화적으로 브리튼인의 왕이라 불린 존재들(브리튼인의 신화적 왕)은 100명 넘게 있지만, 그 존재가 역사적으로 확실한 브리튼인의 왕은 최소 20여명 정도다.

실루레스

실루레스(라틴어: Silures)는 고대 브리튼섬의 강력하고 호전적인 부족 또는 부족연맹체였다. 오늘날의 동남 웨일스 지역에 거주했으며 북쪽으로 오르도비스와, 동쪽으로 도부니와, 서쪽으로 데메타에와 국경을 접했다.

고생물학에서 말하는 실루리아기의 어원이 되었다.

아일랜드인

아일랜드인(아일랜드어: Muintir na hÉireann, Na hÉireannaigh)은 북서유럽에 위치한 아일랜드 섬을 기원으로 하는 국민과 민족이다. 아일랜드 섬에는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9000년 이상 인류가 거주해왔다(선사시대 아일랜드 참고).

어스트라드클리드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웨일스어: Teyrnas Ystrad Clud)은 중세 초기에 브리튼인들이 헨 오글레드 지역(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남서부 및 잉글랜드 북서부 일부)에 세운 국가다. 로마 제국이 망한 뒤부터 국가 형성이 시작되어, 초기에는 수도 툰 프레틴의 브리튼어 이름인 알트클리트(Alt Clut)로 불렸다. 어쩌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나오는 담노니인의 후손이 이들일 수도 있다. 이 일대에서는 고대 웨일스어에서 파생된 컴브리아어를 사용했다.

870년 바이킹 군대가 수도를 공격해온 덤바턴 공성전 때부터 어스트라드클리드, 게일어로는 스트라흘루이(스코틀랜드 게일어: Srath Chluaidh [s̪t̪ra xɫ̪ɯi])인 이름이 나타난다. 어쩌면 이 국명의 변화는 왕국의 중심지가 던바튼에서 고번(오늘날의 글래스고시 남서쪽의 구)으로 이동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이 혈통적으로 컴브리아인이기 때문에 컴브리아(Cumbria)라고도 불렸다.

중세 성기 벽두인 1093년 어스트라드클리드는 게일인 국가인 알바 왕국에게 합병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브리튼인 정체성은 13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이 왕국을 부른 게일어 이름과 영어 이름은 각각 스코틀랜드 스트래스클라이드와 잉글랜드 컴브리아의 어원이 된다.

웨식스 왕국

웨식스 왕국(Wessex, 고대 영어: Westseaxna rīce 웨스트새악스나 리체 - 서색슨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섬 남부에 있었던 앵글로 색슨족의 옛 칠왕국 가운데 하나이다. 519년 부터 애설스탠이 잉글랜드 왕국을 통합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체르딕(Cerdic, /ˈtʃɜːrdɪtʃ/)이 웨식스의 첫 번째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저 전설일 뿐이다. 웨식스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 텍스트로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와 함께 《서색슨 역대 왕위록》이 있으나 두 기록은 여러 곳에서 충돌한다. 첸웰흐가 세례를 받은 후 웨식스는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그의 통치 시기에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이후 채드왈라가 서식스 왕국과 켄트 왕국. 그리고 아일오브와이트 섬을 정복하였다. 채드왈라의 후계자 이네는 최초로 잉글랜드 법률의 시원이 되는 율령을 반포하였고 서색슨의 두번째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 뒤 왕위가 누구에게 이어져 갔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8세기 동안 머시아 왕국의 헤게모니가 성장함에 따라 웨식스는 그 영향 아래 있었다. 이 무렵 지방 행정의 단위인 샤이어가 형성되었다. 에그버트는 서레이 왕국, 서식스, 켄트 같은 둠노니아 지역과 에식스 왕국, 머시아 왕국를 정복하였다. 에그버트는 노섬브리아 왕국에도 일정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머시아가 830년 다시 독립하면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애설울프 시기 덴마크 바이킹의 침입이 시작되어 탬즈 강 어귀에 정착하였다. 애설울프는 로마로 순례길에 오른 사이 아들 에설발드가 왕위를 강탈하자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국토를 할양하였다. 이후 애설울프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였던 알프레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871년 데인족이라 불리던 바이킹들이 침입했을 때 알프레드는 금품을 지급하여 그들을 돌려보냈다. 876년 데인족이 다시 돌아오자 무력으로 쫓아냈다. 878년 데인족은 알프레드를 서머셋 레벨즈까지 몰아붙였으나 에딩턴 전투에서 대패하고 퇴각하였다. 알프레드는 그의 치세 동안 새 법령을 반포하였고 궁정으로 학자를 불러 모았으며 함선의 건조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데인족에 맞서는 방어 체계인 부르흐를 구축하였다. 오늘날 잉글랜드 지명에 남아있는 "-버리"(-bury)는 이 때의 흔적이다. 알프레드의 아들 장자 에드워드는 데인족이 지배하던 미들랜즈의 동부와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을 점령하였고 918년 머시아의 왕비였던 그의 누이 애설플레드가 사망한 이후 머시아를 통치하였다. 927년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탄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하여 잉글랜드는 최초로 하나의 왕국이 되었다. 1016년 덴마크의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웨식스를 백작령으로 삼았지만, 1066년 해럴드 2세가 백작령을 폐지하고 다시 국왕의 직할지로 삼았다. 즉위 직후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전쟁이 일어나 헤럴드 2세가 전사하고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면서 웨식스는 소멸되었다.

웨일스인

웨일스인(웨일스어: Cymry)은 켈트계의 웨일스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이거나, 웨일스 국민을 말한다.

카락타쿠스

카락타쿠스(라틴어: Caractacus, 고대 그리스어: Καράτακος) 중고 웨일스어: Caratawc, 웨일스어: Caradog 카라독, 브르타뉴어: Karadeg)는 기원후 1세기 켈트족 브리튼인 카투벨라우니 부족의 군장으로, 로마의 브리튼 침공에 대항한 저항군을 이끌었다.

카락타쿠스는 회전과 유격전을 병용하며 로마에 수십 년간 저항했으나 결국 후반으로 갈수록 이겨내지 못했다. 전투에서 대패한 카락타쿠스는 카르티만두아 여왕의 땅으로 도망갔으나 여왕은 그를 잡아 로마군에 넘겼다. 카락타쿠스는 저항한 피정복민 군주들이 으레 그랬듯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죽기 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 앞에서 변론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 때 황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목숨을 보존하고 여생을 로마에서 보냈다.

웨일스 신화의 카라독 압 브란,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등장하는 브리튼인의 신화적 왕 아르비라르구스, 원탁의 기사 카라독 등이 카라탁쿠스의 영향을 받아 창조된 인물들로 여겨진다.

커누이드

커누이드(웨일스어: Cynwyd, 라틴어: Cinuit 키누이트[*])는 헨 오글레드의 브리튼인 계열 국가 알트클리트의 5세기 무렵 국왕이다.

할리의 족보서에서는 커누이드를 케레틱 굴레틱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다. 같은 출전에서 커누이드는 둠나괄 헨의 아버지라고 지목된다.:5

그보다 후대의 「북방인의 가계」에서는 둠나괄의 아버지가 커누이드가 아니라 이드너우에트(Idnyuet)라고 하며, 이드너우에트는 막센 울레딕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인의 가계」에도 "커누이드 커누이디온(웨일스어: Cynwyd Cynwydion)"이라는 인명이 등장하는데, 에이던 국왕 클러드노의 조상으로 비정되어 있다. 또 여기에 달린 삼제시에는 "북브리튼의 3대 군벌"로 커누이디온, 코엘 헨, 컨파르흐 오에르를 들고 있다.:256-257

쿠노벨리누스

쿠노벨리누스(라틴어: Cunobelinus, 웨일스어: Cynfelyn 컨벨런)는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하기 전인 기원후 10년경에서 기원후 40년경까지 치세했던 카투벨라우니 부족(오늘날의 이스트오브잉글랜드 지역)의 왕이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에 언급되며, 그 이름이 새겨진 주화가 여럿 발굴된다. 브리튼섬 남동부의 상당히 큰 부분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브리튼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심벨린의 비극』의 "심벨린" 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픽트인

픽트인(Picts)은 로마 제국 시기부터 10세기까지 스코틀랜드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던 부족이다.

헨 오글레드

어르 헨 오글레드(웨일스어: Yr Hen Ogledd [ər ˌheːn ˈɔɡlɛð]→북방 고토)는 중세 초기 후로마 브리튼에서 켈트족 계열 브리튼인들이 살았던 북잉글랜드와 저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지역에서 사용된 브리튼어를 컴브리아어라고 한다.

헨 오글레드 지역에 있었던 주요 국가로는 엘베드(오늘날의 요크셔), 고도딘(오느날의 로디언과 스코틀랜드 변경 지역), 레게드(오늘날의 갤로웨이), 클라이드 내포 주변의 어스트라드클리드(오늘날의 스트래스클라이드와 컴브리아)가 있었다. 그 외에 자잘한 소왕국으로 아에론, 칼흐버너드, 에이던, 러이디니아운, 마나우 고도딘 등이 있었다. 이 중 에이던, 러이디니아운, 마나우 고도딘은 고도딘 왕국의 속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리튼인들의 이들 왕국들은 어스트라드클리드를 제외하면 모두 기원후 800년이 되기 전에 남쪽의 앵글로색슨인과 북쪽의 픽트인들에게 정복된다. 어스트라드클리드는 11세기까지 버티다 게일인 국가인 알바 왕국에게 합병된다. 이로써 브리튼인은 모든 북방 영토를 잃고 웨일스에 고립된다.

헨 오글레드의 유산은 웨일스에 강하게 남아 있다. 많은 초기 웨일스 사료들이 그 저자를 "북방 고토인"들(탈리에신, 아네이린, 머르딘 우얼트 등)에게 돌리고 있으며, 프러데인섬의 삼제시 같은 웨일스 신화에는 북쪽 출신 영웅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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