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공자(중국어: 孔子, 병음: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중국어: 孔夫子, 병음: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1],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1]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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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丘), 자는 중니(仲尼)
Konfuzius-1770
시대 춘추 시대
지역 동양 철학
학파 유학
분야 철학, 정치학, 윤리학, 법학
업적 유가법가의 공동 시조
학력
신상정보
가족관계

생애 초반

탄생과 가계

Confuciustombqufu
산둥 성의 공자 묘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징재(顔徵在)를 맞아 공자를 낳았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뿐이었다.

공자의 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소년 시절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 공자 16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2]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서른 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된다. 그는 학원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束脩)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가르쳤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관료 생활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다.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본국인 주나라낙읍을 돌아보고 귀국한 후 그의 명망은 차츰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공자를 눈여겨 본 노나라의 왕 소공은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다.

주유천하

35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 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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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의 중국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3])가 되었다.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가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예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 주도록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난신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다고도 한다(기원전 496년.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때 제나라에서는 밀자(密者)를 파견하여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공자가 이를 꿰뚫어 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는 의심쩍은 사내를 붙잡아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부(大夫)인 계환자가 제나라의 흉계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낙담한 공자는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채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정치 활동

马远绘孔子像
공자상 송나라 때 마원(馬遠)작

공자의 인망은 해를 더할수록 거듭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구(현재의 법무부 장관) 벼슬에 기용되었고 최고 재판관 및 외교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당시 공자는 순장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꺾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계손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계손사는 노나라 삼환 계손, 맹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이 무렵, 공산불뉴는 삼환과 계손사의 전횡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공자 역시 삼환 등의 무리를 몰아내 어지럽혀진 노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이미 일을 꾀했던 데다 도덕 정치 구현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반역자 공산불뉴가 하극상을 벌인 처지임에도 그가 초빙했을 때 이에 응하는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노나라 출신 제자였던 맹의자, 남궁도등의 만류와 때마침 벌어진 상황 여건의 괴이한 변화로 인해 결국 단념하였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다.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당했다.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생애 후반

교육 활동

(仁)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으나,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공자가 교육에 활용한 경전은 '육예(六藝)' 또는 '육경(六經)'이라 불리는 '역','시','서','예','악','춘추'이다. 당시 육경은 진귀한 서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속수 이상을 예물로 가져온 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문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창작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문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계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자 이전에도 육경의 이름들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유가의 계술이 있은 후에야 단순한 점술서, 잡기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춘추'를 비롯한 종래의 사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공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치관인 정명(正名)론을 끌어내었고 맹자는 이를 '춘추의 대의만은 공자가 은연중에 취했고' 춘추를 정명으로 귀결시키면서 '난신적자를 두렵게'했다고 평하였다.

공자의 말년에 아들인 백어([4])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5])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공자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제자들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六經)에 통달한 이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七十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 민자건,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遊), 자하(子夏) 등이었다. 공문의 많은 제자들 중 안회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말년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3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사후

공자의 승하 후 노성 북쪽(魯城北 曲阜 洙上, 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그 제자이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자사학파에서 갈려 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후 유학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순자의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Stamps Confucius, 1961 issue Vietnam
베트남에서 발행된 공자 우표

738년 당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다. 원나라에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다.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한편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게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다.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다.

사상

Konfuzius standbild 2008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공자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父父子子)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強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強惡)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隱者)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 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利]보다는 뜻[義]를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않는 사(士)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정치관

공자가 교육에 있어 목표로 삼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 인사로서 인격의 완성체인 이른바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1]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 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1]

공자는 군자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위한 경전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의 민요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과 주나라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 등 종래의 전통을 익히고 이어가는 데 마땅한 서책들을 교범으로 사용하였다.[1]

한편 공자는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를 편찬하는 동안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 본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1]

따라서 군자 양성을 목표로 한 공자식 교육의 내용이란 전통을 계승하는 데 적합한 교범의 숙달 및 난세로 치닫는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눈이라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하였다.[1]

철학

LifeAndWorksOfConfucius1687
1687년 프랑스 파리에 소개된 공자의 일대기인《공자생활의 성취》의 일부, Prospero Intorcetta 저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6] 남을 부축하며[7],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자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直)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자사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타

  • 공자의 문하에서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탄생하였다.
  • 보통 유교는 제자 중 증자-자사로 이어지는 학파를 유교의 적통 학파로 간주한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제자였던 자사의 손제자(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학맥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 공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인 자궁(子弓)의 제자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순자가 나왔다. 유교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자궁과 순자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에서는 전국시대이사, 상앙 등의 법가로 발전했다.
  • 곡부 공씨는 공자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으나, 가문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공자를 시조로 간주한다.
  • 한국의 공씨는 원나라 때 고려로 건너온 공자의 후손 공소(孔紹)를 시조로 한다. 원 순제의 조정에서 한림원학사를 지낸 공소는 원나라의 멸망의 조짐이 보이자 고려로 건너왔고 한국 공씨들의 선조가 되었다.
  • 당 현종 때 문선왕으로 추존된 이후 공자를 모신 사당은 문묘(文廟)로 부른다. 신라시대에 한국으로 문묘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고려, 조선에 가서는 성균관에 공자의 사당을 모시므로 문묘는 한국에서는 성균관의 다른 별명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공자의 제자

  • 공문십철
  • 칠십자
  • 민자건(閔子騫), 노나라 공족 민손(閔損)은 자에 성을 붙인 이름이다.
  • 염백우(冉伯牛), 공문십철의 선비로 덕행의 선비다.
  • 자로(子路), 염구와 함께 노나라 정치가이다.
  • 염유(冉有), 계손사 가문의 가신으로 공자에게 배운 전술로 제나라에게 승리했다.
  • 유약(有若), 증자와 함께 대표적인 공자의 제자이다.
  • 안회(顔回), 노나라 공족으로 자는 자연(子淵)이다.
  • 중궁(仲弓), 중궁은 염옹의 자이다.
  • 자공(子貢), 본명은 단목사이다. 위나라 유학자이다.
  • 자유(子遊), 오(吳)나라 사람으로 문학에 뛰어 났다.
  • 증자(曾子), 산동성 출신 유가 철학자이다.
  • 자하(子夏), 위나라 출신이다. 주/위/노/정 공족은 왕족이므로 이름 앞에 자(子)을 붙였다.
  • 남궁도(南容韜), 노나라 출신 공자의 제자이다.

가계와 친족

곡부 공씨

곡부 공씨
  • 증조부 : 공방숙
  • 아버지 : 숙량흘
  • 적모 : 시씨, 아버지 숙량흘의 본부인
    • 이복 누나 9명
    • 이복 형 : 맹피
      • 조카딸 1명
  • 생모 : 안징재
  • 처 : 병관씨의 딸
    • 아들 : 공리, 자는 백어, 50세에 그보다 일찍 사망하였다.
    • 며느리 : 미상, 공리 사후 개가하였다.
  • 외조부 : 안양, 노나라의 무사
    • 이모 2명

관련 인물

같이 보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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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인도의 사상 > 불교 > 원시유교 > 공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글로벌-공자"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 왕숙. 《공자가어(孔子家語)》.
  3. 이하 관직 명
  4. 혹은 리라고도 한다
  5. 〈先進第十一: 9-10장〉. 《論語》. 顔淵死.子曰,"噫! 天喪予! 天喪予! 非夫人之爲慟而誰爲慟 (안연이 죽었다. 공자 왈,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그 사람(안연)을 위해서 애통해 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는가.)
  6. 진기(盡己)
  7. 추기(推己)

외부 링크

고성향교

고성향교(固城鄕校)는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에 있는 향교이다. 유형문화재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교는 지방의 관학기관으로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통영부에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공자 외에 18현의 위패를 모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인 대성전,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된 명륜당,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팔작집인 누문(풍화루) 등 10채의 건물들이 있다.

난강구 (하얼빈시)

난강 구(한국어: 남강구, 중국어: 南岗区, 병음: Nángǎng Qū) 는 중화 인민 공화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 시의 행정구역이다. 넓이는 182.9km2이고,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1,050,000명이다. 난강 구는 하얼빈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이다. 성 정부의 주 관청이 위치해있어 헤이룽장 성의 정치적 중심이다. 난강의 다른 흥미로운 지역으로 하얼빈 기차역과 궈마오 지하 쇼핑가, 공자 사당이 있다. 2013년에 하얼빈 지하철 1호선이 일부완공되어 17.8km 구간을 운행하고있다

난강 구에는 업무 지구와 하얼빈 최고의 쇼핑 센터가 있다. 또한 하얼빈 기술 대학과 하얼빈 의학 대학 등도 이곳에 있다.

논어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문묘

문묘(文廟)는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를 말한다.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묘(廟)는 무덤 묘(墓)가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하며,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해 있다.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을 배향하고, 공문 10철(哲) 및 송조 6현(賢)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동방 18현을 종향(從享) 하였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례 의식인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있다. 태학생(太學生)들의 사표로 삼았다.

삼공 (유적)

삼공(三孔)은 취푸 시에 있는 공자 연고의 사적인 공부, 공묘, 공림을 삼공이라고 하여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서식스 공작 해리

서식스 공작 해리(영어: Prince Harry, Duke of Sussex, 1984년 9월 15일 ~ )는 영국의 왕가 일원이다. 웨일스 공 찰스와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손자이다. 형은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이다.

수원향교

수원향교(水原鄕校)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원종 22년에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던 것을 화성 축성과 더불어 현위치로 옮겨 건립하였고 공자, 맹자 등 선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향교 앞에 하마비가 있고 나무로 건립된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은 소슬삼문 형태이며 명륜당, 내삼문, 동무, 서무, 대성전의 건물이 있다.

앙리 (룩셈부르크)

앙리 드 뤽상부르(Henri de Luxembourg, 1955년 4월 16일 ~ )는 룩셈부르크의 대공이다. 그는 2000년 10월 7일 아버지 장 대공의 양위로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군주가 되었다. 정식 이름은 앙리 알베르 가브리엘 펠릭스 마리 기욤(Henri Albert Gabriel Félix Marie Guillaume)이다.

엄팽조

엄팽조(嚴彭祖, ? ~ ?) 또는 장팽조(莊彭祖)는 전한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로, 자는 공자(公子)이며 동해군 하비현(下邳縣) 사람이다. 하남태수 엄연년의 동생이다.

영국의 군주

영국의 군주는 영국의 국가원수이다. 군주의 호칭은 왕(King)이나 여왕(Queen)이다. 1952년 2월 6일 이후로 현재까지 엘리자베스 2세가 재임 중이다.

외젠 드 사부아 공자

외젠 드 사부아카리냥 공자(프랑스어: prince François Eugène de Savoie-Carignan 프랭스 프랑수아 외젠 드 사부아카리냥[*], 이탈리아어: Principe Eugenio di Savoia-Carignano 프린키페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카리냐노[*], 독일어: Eugen Franz, Prinz von Savoyen-Carignan 오이겐 프란츠, 프린츠 폰 사보이엔카리그난[*]: 1663년 10월 18일 – 1736년 4월 21일)은 유럽 역사에서 가장 탁월하며, 성공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사보이아가의 귀족으로 파리에서 태어나 루이 14세의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다. 외젠은 교회에서 경력을 쌓아 주교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의 나이 19세때 군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을 거절 당하자, 외젠은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외젠은 60년의 기간 동안 3명의 합스부르크 황제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섬겼다. 외젠의 첫 활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은 1683년의 빈 공방전(Siege of Vienna)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벌인 것이고, 뒤이어 신성 동맹 전쟁(War of the Holy League)과 그 후 9년 전쟁에서는 그의 사촌인 사부아 공작(Duke of Savoy)과 함께 싸웠다. 그렇지만, 외젠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 때문이었다. 외젠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하는 동안 말버러 공작과 함께 협력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블렌하임, 오우데나르데와 말플라크의 전장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특히 그는 나아가 북이탈리아의 제국군 사령관으로 출세해 1706년 투린에서 가장 명백한 승리를 얻었다.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 (1716년-1718년)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새로운 적개심을 갖고 시작한 페트로바라딘(Petrovaradin)와 베오그라드에서 승리를 거둬 그의 명성을 굳건하게 했다.

말년인 1720년까지 외젠의 영향력과 능숙한 외교술로 황제의 강력한 동맹을 확보하고 잘 조종하여 부르봉의 힘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했던 그의 말년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동안 그의 마지막 전투에서 군의 총지휘관으로써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생애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외젠의 명성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의 성격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자도 있지만,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긴것에 대해서는 이론은 없었다:외젠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도와 프랑스의 침략을 막아냈다; 또한 그는 서쪽으로 밀어닥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해 오스만 제국의 점령지의 절반과 중부 유럽을 100년 만에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는 예술의 위대한 보호자 중에 한 명으로 그가 건축한 유산은 오늘날 빈에서 볼 수 있다. 외젠은 1736년 4월 21일 72세의 나이로 자신의 저택에서 잠자는 도중에 죽었다.

이탈리아 왕족으로서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 독일에서 장군으로 출세한 이 인물의 국적 정체성을 현대의 국민국가적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 공자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에우제니오 폰 사보이(이탈리아어: Eugenio 독일어: von 영어: Savoy)라고 이탈리아어와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서 서명했다.

원주향교

원주향교(原州鄕校)는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고려시대의 향교이다. 1985년 1월 17일 강원도의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 공자 등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국립 교육기관의 일종이다. 그 역할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수행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교육기관의 지위를 잃고, 제사 업무와 전통문화 전승을 위한 각종 교육 사업만을 진행하고 있다.

유교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의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수기치인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후로는 중국의 학문과 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와 국민생활에 영향을 주었다.유교의 주류는 전국시대에는 맹자로 대표되는 내성파의 학문과 순자로 대표되는 숭례파의 학문,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 명나라 시대의 양명학,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등으로 발전 또는 변천되었다이라고 말하였다.

음력 8월 27일

음력 8월 27일은 음력 8월의 27번째 날이다.

제 환공

환공(桓公, 기원전 720년 ? ~ 기원전 643년, 재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은 춘추시대의 제나라의 제16대 후작이다. 성은 강(姜), 휘는 소백(小白), 시호는 환공(桓公). 춘추 시대의 패자이다. 포숙아의 활약에 의해 공자 규와의 공위계승 분쟁에서 승리해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중국 동주 왕실을 대신해 회맹을 거행했다.

증자 (사상가)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는 중국 전국 시대의 유가(儒家) 사상가이다.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둥 성) 출신이다.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 《대대례기》(大戴禮記)의 증자 10편 및 《효경》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하기 위하여 씨족제로부터 비롯된‘효(孝)’라는 덕목을 강조하였다. 또,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라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충서(忠恕)라는 말로 표현했다.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후에 증자의 학통은 자사, 맹자로 이어져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철학

철학(哲學, 고대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 영어: philosophy)은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생관,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또한 존재, 지식, 가치, 이성, 인식 그리고 언어, 논리, 윤리 등의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대상의 실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말은 프로타고라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철학적 방법이란 질문, 비판적 토론, 이성적 주장, 그리고 체계적 진술을 포함한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용어는 고대 희랍어의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하였는데, 여기서 지혜는 일상 생활에서의 실용하는 지식이 아닌 인간 자신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관조하는 지식을 뜻한다. 이를테면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포함된다.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철학은 어느 문화권에나 오래 전부터 존재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실 학문 그 자체를 논하는 단어였고 전통상으로는 세계와 인간과 사물과 현상의 가치와 궁극적인 뜻을 향한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천착을 뜻했다. 동양의 서구화 이후 철학은 대체로 고대 희랍 철학에서 시작하는 서양철학 일반을 지칭하기도 하나 철학 자체는 동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현대 철학은 철학에 기초한 사고인 전제나 문제 명확화, 개념 엄밀화, 명제 간 관계 명료화를 이용해 제 주제를 논하는 언어철학이나 논리학등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영어: Prince William, Duke of Cambridge, 1982년 6월 21일~)은 현재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장남으로 태어난 찰스 왕세자와 배우자 다이애나 스펜서 공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1982년 6월 21일 월요일 오후 9시 3분에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배우자 필립 공의 손자이기도 하다. 아버지 찰스 왕세자에 이어서, 현재 영국 왕위 계승 순위 서열 2위이다. 형제로는 2세 연하인 남동생 해리 왕자가 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윌리엄 왕자는 하나뿐인 형제이자 동생인 해리 왕자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고 알려졌다. 공식 칭호는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Cambridge"로 케임브리지 공작 전하이다.

2011년 4월 29일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재학 중에 만난 평민 출신 캐서린 미들턴과 혼인하고, 케임브리지 공작 작위를 받았다.

하인리히 추 자인비트겐슈타인

하인리히 알렉산더 루트비히 페터 추 자인비트겐슈타인 백작영식(Heinrich Alexander Ludwig Peter Prinz zu Sayn-Wittgenstein, 1916년 8월 14일 - 1944년 1월 21일)는 독일의 귀족 혈통 출신 공군 군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루프트바페 야간전투기 에이스 조종사였다. 적기 격추수는 83기로 사망 당시 독일 공군의 야간전투조종사 중 최고 격추수였으며 그가 죽은 뒤 하인츠볼프강 슈나우퍼와 헬무트 렌트가 각각 121기와 102기로 기록을 갱신했으나 그래도 3위 기록을 유지했다.

1916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1937년 봄 독일 국방군 기병대에 입대했다. 이후 공군 조종사 훈련을 받아들여 공군으로 이적했다. 첫 자대배치는 제1폭격비행단(KG 1)으로, 관측사로 근무하다 이후 조종사가 되었다. 프랑스 공방전, 영국 본토 항공전, 바르바로사 작전 동안 계속 폭격기 부대인 KG 1과 KG 51에서 근무했다. 이후 야간전투기 부대로 옮겨 1942년 5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에 처음 적기를 격추했다. 이후 1942년 10월이 될 때까지 22기를 격추하여 동년 10월 7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고, 1943년 8월 31일 적기 54기를 격추하여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

1944년 1월 제2야간전투비행단(NJG 2) 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월 21일 밤 83번째이자 마지막 적기를 격추한 뒤 격추되어 전사했다.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사후 추서되었다.

이론
개념
윤리학자
응용윤리학
메타윤리학
관련 문서
제자백가와 그 계승자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음양가
종횡가
병가
잡가
농가
소설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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