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기 그리스

고전기 그리스는 매우 발전된 문명으로서, 고대 로마와 서구 세계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정치, 예술 사상, 과학 사상, 문학, 철학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 고전기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건축, 문화의 측면에서 고전기란 기원전 6세기 대부분, 5세기, 4세기의 시대를 이른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510년에 아테나이의 마지막 참주가 몰락한 시대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기원전 323년까지의 시대로 잡는다.)

Parthenon from south
아테나이의 파르테논 신전. 아테나 여신에 봉헌되었다.

기원전 5세기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의 목표는 종전의 혈연적, 지연적 유대관계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아테나이의 전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새로운 행정구역을 마련하였다. 노예와 외국인 및 여성을 제외한 모든 구민을 등록케 하고, 등록된 구민에게는 핏줄이나 재산 또는 직업에 관계없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아티케를 3개의 지역집단으로 구성하고 각 집단 내의 행정구를 몇 개씩 묶어 10개의 중간행정구역으로 조직한 다음, 각 지역집단으로부터 1개의 중간행정구역, 즉 3개의 중간행정구역으로서 하나의 행정부족으로 구성케 되었으며, 그 결과 아테나이는 전체로 10개의 행정부족으로 구성되었다.

20세 이상의 시민권을 가진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는 500인회의 제안을 토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하고, 사법권은 500인회와 동일한 선출방식으로 구성되는 시민법원이 보유하였다. 귀족정치의 유제인 집정관과 아레이오파고스 회의가 그대로 존속하고, 집정관은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부유한 상위 두 계층에서 선출되었으나 그 권한은 점차 축소 되었다. 유명한 도편 추방 제도는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편(도자기 파편)에 적게하여 그 수가 6000개이상에 달하면 해당인물을 아테나이에서 국외로 10년동안 추방하는 것으로 민주정치를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폴리스들은 서로가 반목을 하고 있었으므로 소아시아의 강대국인 뤼디아가 페르시아에게 굴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를 노렸으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거나, 그들의 후원을 받는 참주지배하의 이오니아 식민시들의 반란으로 본토 진출을 주춤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군은 마라톤에 쳐들어왔다. 아테나이와 적대적인 테바이와 같은 폴리스들은 이를 이용하려 하였고, 스파르타는 구원병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밀티아데스의 선전으로 아테나이는 승리하게 된다. 가죽을 사용한 갑옷등이 등장하고 가벼운 헬멧의 사용으로 농촌이나 도시의 중산층에서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마라톤의 승리에서는 '달리는 중장보병'의 역할이 컸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시 침입하였다. 적과 내통하는 자로 인해서 큰 타격을 입기도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나이는 대승을 거둔다. 다음해 페르시아군은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를 이간시키고 재차 아티케를 점령하여 아테나이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에 스파르타도 많은 구원병을 파견하고 각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서 페르시아를 대파함으로 그리스는 승리를 얻게 된다.

페르시아 전쟁은 동방의 전제정치에 대한 폴리스의 자유적 승리를 뜻한다. 그리스의 승리는 유럽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아테나이의 패권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동방의 전제국가로 건재하였으며, 그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를 맹주로 하는 해상 동맹인 델로스 동맹이 탄생하였다.

규약에 의하면 동맹시는 일정한 병력과 함선을 제공하거나, 그것이 불가능 할때는 자금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자가 대부분이었다. 아테나이는 동맹시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제국의 길을 택하였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테나이 내부의 사회, 경제적인 이유에서이다. 동맹을 해체하고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해상동맹의 공납금과 해상무역에서 아테나이의 패권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아테나이 경제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아테나이의 민주 정치

상공인의 경제적 지위나 발언권도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하여 기초가 마련된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전쟁 후에 더욱 발달하였다.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 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후에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치시대가 완성된다(기원전 457~429년경).

또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500인회의 권한이 민회에 제출할 의안의 준비와 민회에서의 결정사항을 집행할 정도로 축소된 것이다. 다음으로 10명의 장군들의 권한이 확대되어 아레이오 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완전히 누른것이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나이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 거듭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수당제의 확대와 국고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다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한정하는 시민권 제한법을 만들었다(이는 로마와 아주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국고에 의한 수당제의 확대와 철저한 추첨제, 그리고 1년 임기제는 시민으로서 원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가 국정에 참여 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수적으로는 많은 수가 참여하는 민주제는 아니었으나 평등한 정신에 입각한 민주제였다.

이러한 민주제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지도자가 없을 경우에는 아테나이식의 민중지배가 쉽게 혼란에 빠지고, 이른바 중우정치로 타락할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31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404년까지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의 패배로 끝을 맺고 그리스의 주도권은 스파르타가 쥐게 된다.

기원전 4세기

스파르타의 후원 하에 아테나이에는 30인 참주 정치가 시행되나 그들의 공포정치는 반항을 불러 일으켜 얼마 안가서 민주정치가 회복되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제국들에게 아테나이가 걷었던 것보다 고액의 공납금을 요구하고 마침 페르시아의 분쟁을 틈타서 소아시아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를 틈타서 아테나이 외 제국들은 동맹시를 규합하여 테바이를 중심으로 결합하였다.

아테나이는 제2차 해상동맹을 결성하고 테바이와도 동맹을 맺었으나, 테바이의 급신장으로 동맹도 곧 깨진다. 메세니아가 해방되고 스파르타는 그 지도력을 상실하여 곧 테바이가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테바이는 아테나이와 같은 재력이나 문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지도자의 전사로 곧 패권도 사라지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나이ㆍ테바이ㆍ스파르타 사이의 패권 다툼은 그 누구에게도 결정적인 승리를 주지않고, 개별적인 폴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려는 분립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에 따라 폴리스 상호간의 대립과 분쟁을 격화시킴으로 그리스 정치정세를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정치의 혼란과는 달리 경제에서는 여전히 발전하는 듯 보였다.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였으며, 아테나이의 '올빼미 은화' 등과 각 폴리스들의 풍부한 화폐는 상업과 무역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리스는 원래 자원이 빈약한 곳으로 많은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기원전 5세기의 인구증가는 이러한 경향을 촉진 시켰다. 그러나 식민시나 외국의 농업과 공업의 발달로 해외시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해상무역의 축소는 실업자를 증가시키고, 빈민을 축소 시켰다. 폴리스들은 불안한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직을 싫어하며, 군역을 기피하기 시작하여 용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의 폴리스들은 본래의 시민공동체라는 성격을 점차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신흥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흡수 된다.

고대 그리스 문학

고대 그리스 문학은 초창기부터 비잔티움 제국 시절까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문학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졸기 그리스 초기 미케네 시대에 쓰인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이 두 서사시와 ‘호메로스풍 찬가’, 헤시오도스의 두 시집 ‘신들의 계보’와 ‘일과 날’은 고전기부터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까지를 관통하는 그리스 문예 전통의 중요한 기초를 이룬다.

서정시인 사포, 알카에우스, 핀다로스는 초창기 그리스 시 전통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작품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그리스 비극작가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에 관해 그가 쓴 비극들, 특히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로 유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 양식의 경계를 확장한 희곡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 희극’ 양식으로 작품을 쓴 반면, 이후의 극작가 메난드로스는 ‘신 희극’의 선구자였다. 기원전 5세기를 살았던 사학자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는 그들 생애와 그 전의 사건들을 다룬 역사책을 썼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여러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대화편을 쓴 반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수많은 논문들을 저술했다.

중요한 후대 작가들에는 아르고나우타이의 항해기를 다룬 서사시인 아르고나우티카를 쓴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수학의 새 지평을 연 논문을 저술한 아르키메데스, 전기와 수필을 주로 흔 플루타르코스가 있다. 기원후 2세기의 작가 사모사타의 루키아누스는 주로 풍자 작품을 쓴 그리스화된 시리아인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이후의 그리스 문학과 더불어 서구 문학에 있어 풍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많은 고대 로마 작가들은 그리스의 선배들로부터 영감을 얻어냈다. 르네상스 이후로도 단테 알리기에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유럽 작가 태반은 고전적 주제와 동기에 많은 영감을 얻었다.

고졸기 그리스

고졸기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480년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까지의 기간 을 뜻하며, 그리스 암흑 시대 다음이자 고전기 그리스 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시대 구분과 정의는 학자들마다 상이한 견해를 보이나, 그 시작은 대체로 기원전 8세기 중반에서 기원전 6세기 사이로 잡고 있으며 끝은 보통 기원전 480년으로 잡고있다.

고졸기는 고로 기원전 8세기 경부터 기원전 5세기 초까지의 기간을 뜻하는데, 보통 기원전 776년 올림픽 게임의 성립과 기원전 480년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시작과 끝 해의 기점이 된다.

미술사학에서는 고졸기를 보통 기하학기(기원전 900년 - 720년) 다음 시기인 동방화기(기원전 720년 - 600년) 다음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와 흑해를 가로질러 서쪽으로는 마르세유, 동쪽으로는 트라페주스 (트레비존드)까지 정착했는데, 고졸기 말에 그들은 이 지중해 전역을 아우르는 무역망을 만들었다.

고졸기는 그리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8세기 말의 그리스 세계를 8세기 초와 비교하여 완전히 알아볼 수 없게끔 만든 중요한 변화들 이 일어나며 시작되었다. 안토니 스노드그라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고졸기는 그리스 세계의 두 변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졸기 그리스는 “그리스 세계의 국가들의 경계 지도를 그리고,” 특수한 그리스 도시국가 체제인 폴리스를 설립한 “구조적 변혁”과 함께 시작하여 고전기의 지적 변혁과 함께 끝났다.

고졸기 그리스에서는 정치, 경제, 국제 관계, 전쟁과 문화의 발달을 볼 수 있었다. 정치적 문화적인 측면 모두에 있어 고졸기 그리스는 고전기 그리스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리스 문자가 발전하며, 가장 오래된 그리스 문학이 지어지고, 그리스에서 시작된 적회식 도자기와 기념비적인 조각상이 만들어졌으며 호플리테스가 그리스 군의 핵심이 된 시기 역시 고졸기 그리스 시대였다.

아테나이에서는 솔론에 의해 가장 이른 민주정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고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을 가져온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있었다. 한편 이 시기 스파르타에서는 리쿠르고스의 개혁들에 의하여 많은 제도가 제정되었으며 메세니아 지방은 스파르타의 지배하에 들게되어 헬롯 노예제가 도입되었으며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형성되어 스파르타를 그리스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델포이

델포이(고대 그리스어: Δελφοί) 또는 델피(현대 그리스어: Δελφοί, 라틴어: Delphi)는 그리스의 포키스(Phocis)협곡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의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대 그리스의 지명이자 도시를 말한다.

델포이는 고전기 그리스 시대 가장 중요한 신탁이었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움팔로스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고대 그리스어: Πύθον)을 죽였고 그 이래로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피톤이 아폴론에게 패배하기 전 이곳의 지명이 본래 ‘피톤’("썩다"라는 뜻의 동사 (고대 그리스어: πύθειν)에서 파생됨)이었다고 주장한다. 《호메로스 찬가》 중 〈피티안 아폴론 찬가〉에는, 이 지명의 원래 이름이 ‘크리사’였음을 뜻하는 대목이 있다.델포이의 아폴론 성역은 범그리스적인 성소로, 기원전 586년부터 4대 범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열려 4년마다 모든 그리스 세계에서 온 운동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었다. 경기의 승자는, 피톤의 살해를 재현했던 소년이 템피 계곡의 월계수를 잘라와 그 월계관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디자인

디자인(design, 문화어: 데자인)은 동사와 명사로 함께 쓰일 수 있으며, 명사로서의 디자인은 다양한 사물 혹은 시스템(건축에서의 청사진, 엔지니어링 도면, 사업의 표준 프로세스, 서킷보드의 다이어그램, 바느질 패턴 등)의 계획 혹은 제안의 형식 (도안, 모델 이나 다른 표현) 또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안이나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결과를 의미하며, 동사로서의 디자인은 이것들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원화 된 디자인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각자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응용되고 있다. 실질적으로 만져지는 물건을 창조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유리 그릇, 도자기, 나무 장식품 등) 역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만티네이아

만티네이아(Mantineia 또는 Mantinea)는 고전기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두 전투가 벌어진 고대 그리스 아르카디아의 도시였다.

현대에서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주 아르카디아 현 이전의 현 수도였다. 2011년부터 지방 정부 개혁으로 트리폴리의 일부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현재 2011년 기준으로 인구 486명의 네스타니 마을이 자리해 있다. 위치는 아르카디아 북동쪽에 위치해 있고, 현 단위로 205.393 km²의 면적이며, 거주민들의 인구는 2,114명이다. 가장 큰 읍으로는 아르테미시오, 로우카스, 카프사스가 있다.

스파르타 패권

스파르타 패권 또는 스파르타 헤게모니(Spartan hegemony)는 스파르타가 그리스 세계 전부를 장악한 시기를 일컫는다. 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도시국가였다. 고전기 그리스 기간에,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지배하거나, 통치하거나, 또는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이와 델로스 동맹의 패배는 기원전 404년부터 기원전 371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그리스 세계를 스파르타가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도시 국가들의 불신으로 인해, 스파르타는 내정에 대한 기록을 만들지 못했다. 스파르타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 기록은 크세노폰, 투키디데스, 헤로도투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자서에서 온 것이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스파르타 인은 아니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저서는 스파르타의 패권이 끝난 지 수세기 이후에 집필되었다. 이로 인해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스파르타의 정치 제도는 그리스의 다른 어떤 도시 국가와도 분명하게 다른 것이었다.

에피다우로스

에피다우로스(현대 그리스어: Ἐπίδαυρος / 라틴어: Epídauros) 또는 에피다브로스(현대 그리스어: Επίδαυρος / 라틴어: Epídavros)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항구 도시이다. 현재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속하는 기초 자치 단체(디모스) 중 하나이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고대 그리스어: Παρθενών)은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이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되었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도리스식 기둥 양식 발전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신전의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의 민주정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신전으로 역사가들은 이를 옛 파르테논 신전(Pre-Parthenon)이라 칭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여타 그리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도 국가 금고로 쓰였으며, 특히 이곳은 한때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쓰였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에 1460년대 초에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의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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